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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스포츠를 너무너무 좋아한다.
케이블이나 위성방송의 50개 넘는 채널이 모두 다 하루종일 스포츠만 중계했으면
할때도 있다. 주변에 날 아는 사람들은 틀림없이 결혼하면 아내와 이 문제때문에
싸울거라고 말할 정도로 스포츠를 너무너무 좋아한다.
지금 아픈것도 농구하다가 그랬으니 오죽할까. 그래도 후회는 없다.
다치기 직전까지는 쩰로 기분 좋았으니깐. ^^;
수많은 스포츠 스타중에 가장 좋아하는 스타를 꼽으로고 한다면 정말 난감하지만
한참 고민한 다음에 미국 프로야구 Chicago Cubs의 Mark Prior를 꼽을 것이다.
그는 메이저리그 역사상 가장 안정적이고 아름다운 투구폼을 소유한
선수로 꼽힌다. 야구를 잘 모르는 사람이 봐도 그의 투구폼이 예술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메이저리그에 오기 전부터 그는 전형적인 엘리트 코스를 거친 투수였다.
그리고 지금은 시카고 컵스의 미래를 책임질 영건이다.
아래는 mlbbada.com에서 활동중인 Teddy님의 글이다.
컵스의 구단주이면서 시카고 트리뷴을 소유하고 있기도 한
트리뷴 컴퍼니는 상당한 재력의 언론, 출판 대기업입니다.
그들이 발행해내는 잡지 가운데 Chicago 라는게 있죠.
잡지 이름에서도 눈치채셨겠습니다만 시카고 지역에 관한 잡지로
패션, 스타일, 유명 브랜드, 좋은 식당, 고가의 부동산 등등에 관한 기사들이 들어있습니다.
돈 좀 있는 힙스터들을 대상으로 하는 잡지라고 할 수 있겠지요.
뭐 평소엔 이 잡지 별로 사볼 일이 없는 접니다만
지난 9월호는 챙겨서 한권 샀습니다.
네.. 거기엔 마크 프라이어의 기사가 실려 있었으니까요. 흐히히.
오늘은 그동안 쟁여놨던 이 기사를 전해드립니다.
한국에서는 접할 수 없는 잡지의 기사라서
이거야 말로 시카고 사는 생색을 톡톡히 낼 수 있는거겠네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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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MAN WITH THE GOLDEN ARM 황금팔의 사나이
대단한 약진을 했던 프로 2년째 되는해에 컵스의 투수 마크 프라이어는
강력한 양키즈를 상대했고, 야구계의 가장 큰 스타로 올라섰으며
자신의 올스타시즌을 잠깐동안이나마 주춤거리게 했던, 주루중의 충돌에서도 살아남았다.
lovable losers 라는 이미지의 컵스에서 이상하게 느껴질만큼 빛났던 그의 활약들과
22살이라는 나이가 믿어지지 않는 그 성숙함은
그가 살아온 내내 해왔던 평범하지 않은 준비들의 결과라고 하겠다.
Robert Kurson
올해 6월초.. 뤼글리필드는 1938년 월드시리즈 이래 보지 못했던 방법으로 들썩거렸다.
양키즈가 65년만에 이동네에 왔고 그들과의 3연전 마지막 경기는 이미
올시즌 MLB 경기 가운데 가장 관심을 끄는 경기가 되어 있었다.
프레스박스는 물론 가까운 카페테리아와 복도에까지 수백명의 취재진이 넘쳐났다.
ESPN 은 필드에 스튜디오를 설치해놓고 해설자들과 함께 방송을 진행하는동안
어퍼덱은 사람들의 발 굴림으로 들썩거렸다.
경기가 시작되기 몇분전 하루종일 이어지던 빗줄기가 멈추고
햇살이 내리쬐기 시작했다.
그러자 뤼글리필드를 가득 메운 관중들은 환영의 함성을 질러댔다.
" 햇살은 늘 양키즈쪽에 비춘단 말야.. "
라고 컵스팬이 농담을 하자 한 양키팬은 그말이 정답이야 라고 맞장구를 쳤다.
이런 배경들을 뒤로 하고 컵스의 22살 먹은 투수는 워밍업을 시작했다.
긴장하고 있는 선수들과 방송인들과 팬들로 가득한 경기장에서
그는 유일하게 그런 분위기에 초연한 사람같이 보였다.
3일전 컵스의 덕아웃에서 데블레이스와의 경기를 대비하면서
야구 얘기를 나눌 때.. 엄청난 종아리를 가진 그는 벽에 기대서서 이렇게 말했다.
" 저는 양키즈를 상대하는것과 다른 팀들을 상대하는것들에서
아무런 차이도 느끼지 않습니다. 제겐 템파를 상대로 등판하는것과 같은거죠. "
양키즈의 유격수 데렉 지터를 상대로 어떻게 피치를 할것인가 하는 질문을 받자
그는 이렇게 말했다.
" 아직 모르겠어요. "
그당시 그의 그런 담담함은 극기 차원이 아니겠는가.. 라고 이해해야했다.
그들은 양키즈가 아닌가.. 루스와 게릭, 디마지오와 맨틀같은 전설들의 팀.
그러나 지금 양키즈 선수들이 덕아웃 입구에 서서 자신의 모션을 연구하는 속에서
컵스의 불펜에서 캐치볼을 하고 있는 프라이어는
정말로 자신의 상대가 다른 팀들과 다르지 않다고 믿는 것처럼 보였다.
시카고의 모든 사람들과는 달리 그는 정말 그들이 양키즈라는걸
별로 신경 쓰지 않는 유일한 사람이었다.
첫 타자는 좌중간으로 2루타를 때려냈다.
관중석의 올드 타이머들은 곧 닥쳐올 재앙에 대비한 마음의 준비를 했다.
저 젊은이는 자신이 만든 상황에 감사하지 못할거라고...
프라이어는 어떻게 그토록 무심한채 워밍업을 할 수 있었던거지?
그런 가운데 프라이어는 거의 HOFer 인 지터를 상대하려 다시 마운드에 올랐다.
그리고 삼진으로 그를 돌려세웠다. 다음 타자는 파워히터 제이슨 지암비.
프라이어는 그 역시 삼진으로 아웃시켰다.
이제 이 젊은 투수는 숨을 돌릴 틈을 좀 가지게 된 것이다.
프라이어는 양키즈의 위험한 투수인 호르헤 포사다를 조심스럽게 상대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 대신 그는 포사다를 몸에 맞는 볼로 내보내면서
양키즈의 위협을 살아나게 했다.
타석엔 3루수 로빈 벤추라가 서 있었다.
그러나 프라이어의 표정은 여전히 불펜에서 웜업을 할때와 다름이 없었다.
마치 그와 그의 포수만이 존재하는듯한 분위기.
잠시 후 그는 벤추라를 삼진으로 아웃시켰다.
경기장뿐 아니라 인근 아파트들과 식당에서도 환호들이 터져나왔고
프라이어의 이름이 적힌 저지는 여기저기서 펄럭거렸다.
관중석의 올드 타이머들은 프라이어가 마운드에서 걸어나올 때
기가 막히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그들은 자신들이 새로운 종류로 분류될 운동선수를 보고 있다는 것을 알지 못했던 것이다.
상상도 할 수 없는 색다른 방법으로 오늘을 준비해온 그런 선수 말이다.
그들은 또한 마크 프라이어가 자신만의 독특한 방법으로
이 게임을 위한 웜업을 15살때부터 해왔다는것도 알지 못했다.
1958년 윌맷의 로욜라 아카데미의 라이언 신부는
뤼글리필드를 보러가는 여행을 기획했었다.
그때 참석한 사람들 가운데는 8학년의 제리 프라이어가 있었다.
14살의 나이지만 이미 엄청난 종아리 근육과 대퇴 근육을 가지고 있었던 그는
뤼글리 주변에서 시카고의 풋볼팀인 베어스가 스카웃 하러 올때까지
기다려야할 것 같이 보이는 체격의 소년이었다.
프라이어는 로욜라를 졸업하고 내쉬빌로 향했다.
벤더빌트 대학에서 풋볼을 하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그는 벤더빌트를 졸업한 밀드레드와 결혼식을 올리기 전 샌디에고로 이사했다.
거기서 그는 재정상담가로 일했고 밀드레드는 교육자가 되었다.
그들은 곧 세 아이의 부모가 되었다.
제리 3세, 밀드레드, 그리고 1980년 9월 7일 태어난 마크라는 이름의 아이..
이렇게 셋이었다.
프라이어네 세아이는 모두 제리의 운동신경 유전자를 이어받은 듯 보였다.
그들은 농구와 테니스와 야구에서 두드러진 재능을 보였다.
가정에서 어머니 밀드레드는 교육을 스포츠의 전제조건으로 만들었고
그 결과 아이들은 공부에서도 A 학점들을 받아왔다.
프라이어네 아이들이 경기에서 두각을 나타내면서
제리는 자신의 아이들을 위한 가장 정제된 운동 교습을 준비하고 또 연구했으며
상당한 금액을 지불하면서 코치와 트레이너를 고용했다.
이런 모든 것은 일반적인 이유들때문은 아니었다.
대부분의 많은 부모들이 자신의 아이들의 경기와 기록에 사로잡혀 있는동안
제리는 단 한가지에만 집중하고 있었다.
균형과 컨디션 같은 것에 대한 좋은 매카닉스가 바로 제리가 집중한 유일한것이었다.
" 아버지는 저를 프로 운동선수로 키우기 위해 훈련 시키신건 아니었어요.
아마 그건 아버지의 마음속에서 가장 뒤쪽에 밀려있는거였을겁니다.
모든 훈련들은 다음 단계로 올라가거나 이기기 위한 것들은 전혀 아니었죠.
언제나 제대로 된 가르침과 폼의 교정에 관한것들이었어요. "
라고 프라이어는 말했다.
아버지인 제리 프라이어는 이런 얘기를 한다.
" 아이들에게 가장 중요한건 올바른 테크닉을 가지게 하는거라고 우리는 믿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다치거나 , 스포츠의 한 부분이 될 수도 있는 약물 오용의
대상이 되지 않도록 하는걸 확실히 하고 싶었죠. "
15 살때 마크는 들쑥날쑥한 패스트볼을 던지는 호리호리한 투수였다.
고등학교때 한 게임에서 그는 9점 이상을 내줬었다.
그날 관중석에는 자신의 아들을 응원하려고 왔던 탐 하우스 Tom House 가 있었다.
예전 메이저리그 투수였고 또 피칭 코치였으며
놀란 라이언이나 랜디 존슨 같은 위대한 투수들을 연습시켰던 바로 그 탐 하우스였다.
하우스의 교습방법은 정통적인 것은 아니라는 얘기가 있었는데
패스트볼을 던지는 젊은 투수들에게 그는
"기능적 힘" 이나 " 좌우 양측 시스템 " 같은 개념을 말하곤 했다.
그는 심리학 박사 학위를 가지고 있었고 또 다른 네 개의 학위도 가지고 있었으며
다가오는 밀레니엄을 엘리트 운동선수들을 위한 신시대라고 말하는 영약학자였다.
그날 그 게임이 끝난 후 제리 프라이어는 하우스에게 다가가서
자신의 아들을 도와줄 수 있는지 물어봤다.
" 우리가 할 수 있는건 참 많을겁니다. 하지만 매카닉스에서부터 시작하죠. "
라고 하우스는 대답했다.
컵스는 1회말 양키즈를 상대로 석점을 뽑아냈다.
프라이어는 이제 어느 정도의 쿠션을 가지게 된 것이다.
그러나 2회초 라울 몬데시는 2루타를 쳤고
프라이어는 그날 자신의 두 번째 HBP를 기록하며 히데끼 마쓰이를 내보냈다.
양키즈의 위협이 다시 시작된것이었다. 노아웃 주자 1,2루.
하지만 프라이어의 표정은 아직도 변하지 않고 그대로였다.
그는 경기에 집중했고 후안 리베라에게서 병살타를 뽑아낸 다음
앤디 페팃을 삼진으로 처리했다.
그러자 관중들은 더 커다란 함성을 질러댔다.
2이닝동안 삼진 네 개. 마크 프라이어는 양키즈를 묶어놓고 있었다.
하우스는 15살의 프라이어와 함께 어디서부터 시작해야할지 감이 잘 잡히지 않았다.
녀석은 키가 크고 마른 편이었다.
하우스는 그때 프라이어를 ' 귀가 달린 연습용 배트 ' 같았다고 표현하면서
이렇게 당시를 회상했다.
" 다듬어지지 않은 재능이 있었어요.
하지만 마크는 딜리버리를 같은 폼으로 반복하지 못했죠.
집중하는 능력 역시 그리 대단하지 못했어요.
그러나 한가지는 정말 저를 놀라게 했죠.
15살의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그 아이는 목표 달성에 있어서만큼은
무서울 정도로 남달랐습니다. "
하우스는 자신의 철학을 펼쳤다.
그는 프라이어에게 모든 엘리트 운동선수들은
매카닉스, 근력, 신진대사, 정신-정서적 영역..
이렇게 네가지 카테고리에서 다른 사람들보다 뛰어나다는 얘기를 했다.
프라이어의 매카닉스는 훌륭했으나 그는 피칭 모션을 계속 반복하기 위한
근력이 부족했다.
또한 그의 신진대사는 식이요법과 운동요법등을 통해 개선될 여지가 많았다.
정신-정서적 부분은 야구와 인생에 대한 오랜 대화 끝에 결론이 나왔다.
이 네가지는 각각 상호작용을 할 수 있는것이었다.
프라이어는 하우스의 가르침을 철저히 따랐다.
얼마 지나지 않아 아버지에게서 물려받은 커다란 종아리와 대퇴부 근육은
홈플레이트를 향해 공을 뿌릴 때 엄청난 폭발적인 추진력을 만들어내는
원동기 역할을 하게 되었다.
웨이트 트레이닝과 적절한 영양섭취는 프라이어의 하반신의 지구력을
최고조로 끌어올렸으며 이것은 프라이어가 다리 동작을 반복해서 할 수 있도록 만들었다.
하우스는 프라이어에게 자신이 봤던 위대한 투수들에 대한 얘기를 해줬다.
랜디 존슨은 어땠는지, 놀란 라이언은 경기 시작 전까지 자신의 마음을 비워서
경기에 침착하게 임할 수 있도록 어떻게 준비를 했는지에 대한 것들이었다.
프라이어는 그 모든 가르침을 받는대로 집어삼켰다.
" 그는 내가 가르쳤던 그와 비슷한 나이 그룹의 투수들 가운데
가장 재능있는 투수는 아니었습니다.
더 강한 볼을 던지고 또 웨이트룸에서 더 무거운 걸 들어올리는 아이들이 있었죠.
하지만 나는 그녀석만큼 내 계획의 네가지를 다 발전시킨 녀석은 본적이 없습니다.
어린 나이부터 그는 내가 야구계에서 알고 있는 그 누구보다도
네가지 부문의 최고 조합이었어요.
그는 코칭 과학이나 의료 과학의 최첨단 연구가들이 30년간 모아온 결과들,
그런 최신 연구결과가 반영된 대표적 인물이 되어가고 있었습니다. "
라고 하우스는 말한다.
마크가 하우스와 훈련하는동안 제리 프라이어는 자신의 아들에게
또다른 비전통적인 방법을 제시했다.
짐 브로갠 Jim Brogan 은 샌디에고 클리퍼스를 위한
국내 농구연맹에서 뛰었으며
현재는 널리 인정받는 청소년 농무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었다.
브로갠의 접근방식은 농구에 대한 것 만큼 인생에 대한것이기도 했다.
그런 개념이 제리 프라이어의 마음을 끄는 요인이었다.
그리고 이제 마크의 차례였다.
브로갠은 아직은 자신이 하고 싶은 운동이 어떤건지,
야구인지 농구인지가 확실하지 않은 어린 프라이어와 훈련을 해나갔다.
브로갠은 마크에게 미래에 이루고 싶은 목표의 리스트를 만들어보라고 했고
곧 10 단계 성공 프로그램을 시작했다.
그러는동안 그는 대개의 10 대 아이들이 흘려보내기 쉬운 것들을
젊은 운동선수에게 요구했다.
자유투 연습을 하는동안 브로갠은 프라이어의 면전에 서서
소리를 지르고 손을 흔들어댔다.
당시 브로갠이 프라이어에게 했던 이야기.
" 우리는 게임 상황을 연습해야해. 너는 게임이 시작되기 오래 전부터
정신적으로 준비가 되어 있어야한다구. "
처음에 프라이어는 그런 어수선함속에서는 공을 던지지 못했다.
하지만 셀 수 없는 반복이 이어지고 난 후 프라이어는
마치 혼자 체육관에 있는것처럼 공을 집어넣기 시작했다.
그 연습은 충분히 이성적인것이었다.
그러나 브로갠에겐 이제 막 시작한것에 불과했다.
그는 다음 단계로 프라이어에게 눈을 감고 자유투를 쏘라고 지시했다.
그당시 프라이어는 6 피트 5인치, 225 파운드인 지금 체격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그러니 게임 상황에서는 슬램 덩크도 하고 남을 체격인데
그런 그가 정말로 눈 감고 경기하는 연습이 필요했을까?
브로갠은 프라이어에게 이런 말을 했다.
" 단순한 시각(sight)은 눈에서부터 오겠지만 통찰력(vision)은 마음에서 오는거야.
최고의 운동선수들은 마음으로 사물을 보는거다. "
프라이어는 눈을 감았다. 그리고 그가 던진 공은 백 보드를 완전히 벗어나는것이었다.
그런 결과는 계속 이어졌다.
하지만 그는 쉬지 않고 연습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보지 않고도 자유투를 성공시킬 수 있었다.
브로갠은 프라이어에게 팔을 두르고는 이렇게 물었다.
" 자아.. 이제 나에게 말해보렴. 야구에서 공을 던질 때 왜 눈을 뜨고 있어야하지? "
프라이어는 이런 질문을 받고는 웃어버렸다. 브로갠은 당시를 이렇게 회상했다.
" 하지만 그는 그것에 대해 생각하더군요. 저는 절대 잊지 못할겁니다.
그가 그 문제를 생각하는 모습은.. 정말 직접 봤어야해요. "
어느날 브로갠은 자신의 학생들을 불러모으고는
그들에게 스포츠는 리듬의 게임이라는 것을 인식시켰다.
엘리트 선수들의 내면에는 음악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그는 학생들에게 그들이 그런 것을 보여줬으면 한다고 말했다.
아이들은 조용해졌다.
브로갠의 말은 이어졌다.
" 나는 너희들이 하나 하나씩 혼자서 여기 올라온다음
그룹 앞에서 춤 추길 바래. 음악은 없다. 그저 너희들과 너희들 내면의 리듬뿐이지.
운동선수로서 여기 올라와서 춤을 추거라. "
브로갠은 당시를 회상하며 이런 얘기를 했다.
" 그것은 리듬이 스포츠에서 어떤 의미가 있는지에 대한 교훈이면서
아이들의 용기에 대한 테스트였습니다.
레이커스를 상대로 시간이 남지 않은 상태에서 자유투를 쏠 때
그땐 자기 자신에게 대답할 수 있어야하니까요. "
프라이어는 앞으로 나왔다. 누구도 입을 여는 사람은 없었다.
그는 지금 컵스의 동료들이 그를 묘사하는것과 거의 다름 없이
당시에도 조용하고 수줍은 소년이었다.
춤추는 것은 그와는 별 상관 없는것이라는게 맞는 말일거다.
어쨌든 그는 몸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자유형식..의 마치 스파게티 가락이 움직이는듯한 춤이랄까..
사실상 리듬감하고는 거리가 먼...
운동선수들이 옆선수를 웃기려고 할때나 할만한 동작들이었다.
" 그는 모든 아이들 앞에서 춤을 췄습니다.
그 춤이 어땠냐구요?
솔직히 말해서 녀석은 리듬면에서는 배워야할 부분이 많았습니다.
하지만 그는 내가 가르치려고 한걸 이해하고 있었죠.
겨우 11학년이었는데도 그는 그 위에 나와서 춤을 추는것과
뤼글리필드에서 양키즈를 상대로 공을 던지는것의 연관성에 대해 이해하고 있었어요."
3회쯤부터 프라이어는 자신의 리듬을 찾아가기 시작했다.
그는 지암비에게 홈런을 허용했지만 3회에 삼진 두 개를 잡아냈고
4회에 역시 삼진 하나를 추가하면서 양키즈에게 점수를 허용하지 않았다.
5회초.. 그는 세명의 타자를 삼진으로 잡아냈으며
그 후 또 두명을 삼진으로 돌려세웠다.
컵스는 6 대 1 로 이기고 있었고 프라이어는 5회까지 삼진 아홉 개를 기록했다.
프라이어가 필드에서 걸어나올 때...
언제나 양키즈를 비춘다는 태양은 관중석 뒤쪽으로 뉘엿뉘엿 지고 있었다.
프라이어가 마운드를 제압하던 고등학교 졸업반 시절..
프로 스카웃들은 그를 주목했다.
그리고 양키즈는 1998년 겨우 17살이었던 그를 드래프트했다.
협상은 몇주동안 이어졌다. 여러 가지 사항들을 놓고 밀고 당기기를 하고 있던 당시
제리 프라이어는 자신의 아들의 변화를 봤다.
" 마크는 친구들과 시간들을 보내기 시작했죠.
그들 모두는 대학에 진학할 계획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고등학교 졸업반을 즐기기 시작한 마크는 대학생이 되는건 어떨까.. 하는
느낌을 가지기 시작했던 것 같아요. "
결국 양키즈는 프라이어에게 계약금으로 $1.64M을 제시했다.
고등학교 졸업예정자 가운데 최고의 금액이었다.
제리 프라이어는 아들과 얘기를 했다.
그 당시를 회상하는 제리.
" 그 과정 내내 우리는 마크에게 말했죠.
' 네 결정이 어떤것이든간에 돈이 그 결정의 바탕이 되지는 않게 해라.
만약 네 인생의 첫 결정을 돈을 바탕으로 내린다면
그 이후엔 돈이 너의 남은 인생 전부를 지배할테니까.
그러니 돈은 제껴놓고 나머지 부분에서 장단점을 비교해보렴. '
이라고 말입니다. "
마크는 쉽게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던 그는 돈 없이 대학 캠퍼스에서 지내는 자신과
돈 없이 양키즈 팜 시스템에 있는 자신을 상상해봤다.
그렇게 시간이 지나고 아버지가 그에게 이젠 결정을 내릴 시간이라고 말했을 때
마크는 양키즈의 브라이언 캐시맨 단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리고는 매우 정중하게 " No, Thanks " 라고 말했다.
" 저는 학교에 가서 대학생활을 즐기고 싶었습니다.
루키볼에 가고 버스로 여기 저기 여행하고 싶지는 않았어요.
그정도의 돈은 정말 좋은거지만.. 저는 대학을 원했지요. "
프라이어는 자신의 부모님이 졸업한 밴더빌트를 선택했다.
학교팀에서 투수로 지내면서 그는 4승밖에는 올리지 못했으며
여덟 번의 패배를 기록했다.
9이닝당 방어율은 평범한 수준인 4.59 였다.
그 시즌 후에 프라이어는 집에서 가까우며
1년내내 야구를 할 수 있는 날씨대에 있는 학교인 USC 로 옮겨갔다.
그런 이동은 그를 바꿔놓았다.
대학 2학년때.. 그는 10승 7 패에 방어율 3.56을 기록했으며
팀의 삼진 부문 선두를 달렸다.
팀 동료들은 그에게 "Calfzilla" 라는 별명을 붙여줬다.
엄청난 사이즈와 힘을 가진 그의 종아리 calves 때문이었다.
- calf 와 고질라의 합성어겠죠. 히힛
귀걸이도 하지 않고 문신 하나 없었지만 누구보다 빛나보인 그는
바지도 예전 선수들이 했듯 무릎 아래까지 올려입었다.
" 19 살의 나이에... 생각하는건 무진장 노티나는 녀석이었어요. "
대학 시절 코치 마이크 길레스피는 그를 이렇게 기억했다.
" 그는 과거로의 회귀였죠. 꿈이 이뤄지는 것 같았습니다. "
- 크하.. 이 양반 요즘 선수들 옷입는 방식이 어지간히 짜증났었나부죠?
하긴 뭐.. 저도 이점에는 길레스피 코치랑 생각이 같으니.. 흐...
2학년이 끝나고 프라이어는 길레스피가 코치를 맡고 있던 USA 대표팀에 합류했다.
유혹들이 가득한 것으로 유명한 도시의 밤거리와 또 그걸 즐길 기회가 넘치는
암스텔담에서 열리던 국제 토너먼트에서
그는 만명의 열광하는 팬들이 보는 가운데 쿠바의 최고팀을 두 번이나 잡아버렸다.
길레스피는 당시를 이렇게 얘기했다.
" 거의 기묘한 수준이라고나 할까요.
무슨 일에도 흔들리지 않으면서 자기자신다운 모습을 유지하고
또 자신의 스터프를 믿는 그 딴세상인간같은 능력을 마크는 가지고 있었습니다.
지금 사람들이 보는게 바로 그거죠.
그는 자신이 처한 상황에 전혀 영향 받지 않습니다.
그당시 선수들 수준이나 나이등을 감안해보면
마크의 그런 모습은 거의 믿을 수 없을 정도였습니다.
자신감과 꾸준함에 있어서 그는 정말 대단했습니다. "
지금 미국 야구팀을 총지휘하는 스티브 코헨은 또 이렇게 말했다.
" 침착함과 감정의 절제에 있어서 그는 대단히 독특합니다. 거의 비정상에 가깝죠.
그 집안에 뭔가 비법이 있는 것이 확실해요.
그것 말고는 제가 본걸 설명할 길이 없어요. "
코헨은 프라이어의 커리어에서 또 하나의 전환점이 된 일을 얘기해줬다.
암스텔담에서의 토너먼트때 있었던 일이다.
프라이어는 잘 던졌지만 한국팀에게 1 대 0 으로 패했다.
-자책점은 아니었다고 하는데.. 당시 한국 대표팀 멤버들이 누구였는지 모르겠습니다
" 그는 그렇게 잘 던져놓고 졌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데 좀 힘들어했고
자신에 대한 회의도 좀 느끼는 듯 했습니다.
자신이 던졌던 피치 가운데 한두개 정도 맘에 안들던 피치를 계속 생각하고 있었죠.
그런데 그때 마크의 형이 결혼식을 올렸습니다.
그래서 그는 1주일 휴가를 받아서 결혼식에 참가하고 왔죠.
1주일동안 야구를 떠나 있었던겁니다.
그런데.. 그렇게 다녀오기 전에도 그는 정말로 멋진 피칭을 보여줬었는데
다녀온 다음에는 뭐랄까 또 완전히 다른 사람같은 느낌을 줬습니다.
그를 상대로는 그 누구도 이길 가능성이 없었죠. 아예 공에 손도 못대더군요.
저는 그 1주일간의 시간동안 대체 무슨 일이 그에게 일어났는지 모릅니다만
아 정말... 그는 언히터블이었어요.
저는 그 누구도 그런 수준으로 공을 던지는걸 결코 본적이 없습니다.
챔피언쉽 게임의 1회에서 그는 95 마일짜리 공을 던졌죠.
3번 타자가 네 개의 패스트볼을 치긴 하는데 파울밖엔 안되더군요.
그리고 마크는 악마같은 커브볼을 던졌습니다.
타자는 그저 거기 서 있을 뿐이었죠. 움직이지도 못하더군요.
그건 마치 마크가 이렇게 말하는 것 같았습니다.
' 넌 끝났어 ' 라구요.
그가 던진 그 커브볼... 그건 그날 제가 봤던..
정말 평생 기억에 남을 아름다운것이었습니다. "
사람들은 아직도 프라이어가 어떻게 SC 에서의 첫해를 그렇게 해냈는지 잘 알지 못한다.
그는 15승 1패, 방어율 1.69를 기록했고
139 이닝의 투구동안 삼진 202 개를 잡으면서 볼넷은 18 개만을 내줬다.
11 대 1 이라는 이런 삼진/볼넷 비율은 어디서 듣도 보도 못한것에 가까운 것이다.
그해 전국의 모든 스포츠관련 출판물들은 그를 올해의 선수로 선정했다.
베이스볼 어메리카는 그를 역사상 최고의 대학선수라고 불렀다.
그런 모든 일들이 벌어지는동안 마크 프라이어는 탐 하우스, 그리고 짐 브로갠과 함께
연습하고, 게임을 연구했고, 컨디션을 조절했고, 무진장 준비했고, 리듬을 익혀갔고,
sight 와 vision 의 차이를 심사 숙고했다.
그리고 자신의 경영학 학위를 향한 높은 학점들을 얻어나갔다.
그러나 궁극적으로 이 학위는 좀 더 기다려야하는 것이 되었다.
당시 스카웃들은 침을 흘리고 있었으며
프라이어는 국내에서 최고의 드래프트 유망주로 꼽히고 있었다.
그리고 결국 그를 드래프트하는 그 멋진 순간은 컵스에게 돌아갔다.
미네소타 트윈스가 자신들의 퍼스트 드래프트 픽으로
그동네 출신 포수인 조 마우어를 선택했기 때문이었다.
컵스는 내립다 달려들어서 그와 계약했다.
5년 $10.5 M 라는 그의 계약은 아마추어 사상 가장 큰 것이었다.
브롱스에서.. 조지 스타인브래너는 가슴에 쓰라린 통증을 느꼈을테지.
-트윈스가 더 아까운거 아닌가.. 싶으실지 모르겠는데요.
그넘의 짠돌이 구단주로서는 저런 돈은 꿈에서도 생각못할테고..
그러니 픽해놓고 계약 못해서 날리는것보다 차라리 저쪽을 택한거겠지요.
구단주가 부자면 뭐해.. 쯔쯧.
6 대 1의 리드를 유지한채 6회초에 들어서면서 프라이어는 양키즈의 첫 두타자를
대미지 없는 플라이 아웃으로 처리했다.
그러나 라울 몬데시는 좌측으로 홈런을 날렸고
이어 타석에 나선 히데끼 마쓰이는 좌중간으로 2루타를 쳐냈다.
그리고 후안 리베라가 안타를 치면서 마쓰이는 홈에 들어왔다.
갑자기.. 프라이어의 리드는 6 대 3 석점 차로 줄어들어 있었다.
뤼글리필드의 양키즈 팬들은 주먹을 휘두르며 함성을 질러댔다.
-아무래도 필자가.. 저를 본게 아닌가 싶습니다 -_-;;;;
그날 양키즈 저지 입고 이 경기 갔었거든요..
위기에 처한 프라이어... 타석엔 버바 트래멀이 대타로 나왔고
그날 처음으로 프라이어의 표정이 변해있었다.
컵스에서의 첫 번째 등판은 화이트삭스와의 스프링 트레이닝 경기때였다.
그는 3이닝동안 삼진 일곱 개를 잡아냈다.
화이트삭스의 제리 매뉴엘 감독은 그의 스터프를 커트 쉴링에 비교했다.
겨우 21살의 나이인 프라이어를 말이다.
컵스는 프라이어를 마이너로 보냈다. 처음에 그가 간곳은 더블 A 웨스트 테네시였고
다음은 트리플 A 아이오와였다.
엄청난 군중들이 이 대단한 녀석을 위해 몰려들었다.
중부지구에서 허우적거리던 컵스가 그를 불러올리기 전까지 머물렀던
이 두 레벨의 마이너팀에서 그는 도미넌트한 투수였다.
파이리츠를 상대로 한 그의 메이저리그 데뷔전을 보기 위해
뤼글리필드에는 구름같은 관중이 몰려들었고 매진 사례를 기록했다.
-저도 이 경기 보러 갔었습니다. 아이고 그 표 구하느라고 어찌나 고생했는지
프라이어는 6이닝동안 열명의 타자를 삼진으로 돌려세웠으며
파이리츠에게 7 대 4 로 승리했다.
다음날 워싱턴 포스트는 프라이어가 긴장한 기색이라고는 찾아볼 수가 없더라고 보도했다.
탐 하우스 역시 놀라지 않았다.
그는 사람들에게 프라이어는 이미 그 게임을 15살때부터 준비해왔다고 말했다.
프라이어는 컵스에서의 2002년 시즌을 6승 6패 방어율 3.32 로 마감했다.
-에휴 불쌍한 녀석.. 팀이 구리해서 쩝...
그는 117 이닝 가까이 던지면서 147명의 타자들을 삼진 시켰는데
1이닝당 평균 삼진수는 엄청난 것이었다.
오프시즌 그는 탐 하우스와 함께 계속 훈련을 해나갔다.
또한 배낭을 어깨에 메고 USC 캠퍼스로 경영학 수업을 들으러 갔다.
마케팅 클래스를 위해 그는 어떻게 애나하임 에인절스 같은 낮은 페이롤 팀이
양키즈 같은 엄청난 페이롤팀을 상대로 살아남을 수 있었는가를 분석한 리포트를 썼다.
" 경영학 학위를 따려면 아직도 클래스를 두 개 더 들어야해요.
2003년 시즌이 끝난 다음에 할겁니다. 그리고 똑같은 배낭을 쓸거예요. "
겨울동안 프라이어는 링컨 팍에 타운하우스를 사서
시카고의 집으로 삼았다.
지난 3월 스프링 트레이닝때 그는 지켜보는 사람들을 계속 놀라게 했다.
컵스에 새로온 포수 대미안 밀러는 그와 케리 우드에 대해 이런 얘기를 했다.
" 그들의 스터프는 제가 봐온 가운데 최고급입니다.
랜디 존슨과 커트 쉴링 보다 좋으면 좋았지 떨어지지 않아요. "
프라이어는 2003년 시즌 불꽃처럼 강렬히 빛났다.
팀 동료와 상대팀 선수들은 모두 그의 딜리버리의 매력에 뻑이 갔고
그가 가진 조용한 매카닉스에 넋을 잃었다.
" 그는 제가 봤던 그 누구보다도 스무스한 딜리버리를 가지고 있어요.
볼이 그저 손에서 튀어나오는거예요. 술술 던지죠.
그는 어떤 게임 상황에서도 다음 타자에게 어떻게 던질것인가.. 라는걸
짐작하지 못하게 하는 투수입니다.
그는 어프로치를 전혀 바꾸지 않아요. 놀라울 정도로 집중하고
자신이 스스로 열받아 하지 않도록 하는거죠. "
라고 케리 우드는 말했다.
또 팀의 베테랑 투수인 마이크 램린저는 이런 얘기를 한다.
" 그는 사람들이 말하는 ' 엄청난 내공의 침착함'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건 뭔가 마구 엉망이 되어가기 시작할 때 자신이 하고 싶은 것이 무언가..라는
개념을 유지하는 능력이지요.
그 나이에 그런 능력이라니.. 놀라울 수 밖에요. "
시즌이 시작되고 한달 조금 더 지났을 때 프라이어에겐 테스트가 닥쳤다.
컵스는 샌프란시스코에서 자이언츠와 경기를 했다.
스포츠 역사상 최고의 홈런 타자인 배리 본즈는
이틀전 우드에게 두 번 볼을 맞으면서 거의 성깔을 부릴뻔 했었다.
프라이어의 전략은 본즈에게 인사이드 공을 던지고, 다음에 아웃사이드로 던지고
그리곤 다시 인사이드 공을 던지는것이었다.
프라이어가 던진 세 번째 공은 이 38살의 배리 본즈 허벅지에 맞았고
본즈는 욕을 퍼부으면서 마운드를 향해 걸어가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것은 프라이어의 순간이었다.
그의 반응은 야구계의 기록에 길이 남겨질 것이다.
그의 담력과 터프함과 게임에서의 위상에 대한 얘기들로 말이다.
피칭은 존경에 대한 것이다. 존경이 없다면 투수는 껍데기인 것이다.
프라이어는 본즈를 향해 걸어나갔다.
" 저는 거기 있었습니다. 그때 제 반응은 이랬죠.
' 이거 재미있겠는걸 ' 이라구요.
마크가 얼마나 강한지 아는 사람은 그렇게 많지 않습니다.
예전에는 이런걸 장력.. 이라고 불렀는데요.
즉 키가 큰 사람이 네모형의 체격을 가진 사람보다 더 강해질 수 있다는거죠.
확실히 본즈는 체격이 큽니다. 하지만 저는 마크가 물러서지 않을거란걸 알고 있었죠."
라고 그의 아버지 제리 프라이어는 말했다.
프라이어는 자신의 생각을 본즈에게 표현했고 양팀의 벤치는 비워졌다.
프라이어는 단 한걸음도 뒤로 물러서지 않았다.
그러나 펀치가 오간 것은 아니었다.
" SC 코치와 함께 중계방송을 보고 있었는데요.
저는 경기가 진행되는동안 그의 셀폰에 전화를 했습니다.
그리고 우리 둘은 전화에 대고 이렇게 소리를 질러댔죠.
' 참 잘했다!!!! 네가 이긴거고 또 그정도 위협엔 꼼짝도 안한다는걸 보여줬어 !!!
우리는 네가 자랑스러워서 미치겠구나!! 쥑였어 아주!!! ' 라구요.
그는 싸우려고 그런건 아니었지만 자신이 옳다는 것을 알고 있었고
게임의 가장 유명한 이름 앞에서도 당당했습니다.
아마 그 일 이후에 리그 전체가 그를 다르게 봤을거란걸 내 보장하죠. "
라고 그의 대학시절 코치 길레스피는 말했다.
그일은 이번 시즌 프라이어에게 닥친 마지막 도전은 아니었다.
7월 초 그는 애틀랜타 브레이브스의 2루수 마커스 자일스와 충돌했고
그때 입은 부상은 올스타전에서의 등판을 건너뛰게 했다...
지난 6월로 돌아가서.. 양키즈와의 경기를 3일 남겨놓은 컵스의 덕아웃에서
프라이어는 자신의 다음 등판에 대해 전혀 마음이 동요되거나 하지 않고 있었다.
그는 자신의 새 집에 대해서 얘기했고
전철 타고 다니는걸 좋아한다는것에 대해 얘기했으며
어느 거리를 걷든지간에 좋은 식당을 찾을 수 있는 것이 얼마나 멋진지에 대해 얘기했고
또 고등학교시절 만난 자신의 약혼녀 헤더에 대해 얘기했다.
그는 진짜로 양키즈를 상대하는것에 대해 다르게 느끼지 않는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지금 덕아웃에 있는 수준 정도로
자신은 경기장에서도 모든것이 차단된 조용한 상태라는걸 인정했다.
" 저는 뭔가 분위기를 띄우려고 하지는 않습니다.
그저 제 자신 변하지 않으려고 하면서
제가 정말 좋아하는 동료들과 함께 하려고 하는거죠.
저는 바에 가지 않고 또 늦게까지 밖에서 머물지 않습니다.
집에 가서 침대에서 스포츠센터나 레터맨을 보거나 아니면 영화를 보죠. "
45분에 걸친 점심 시간동안 프라이어는 거의 모든 질문에 간단한 어조로 대답했다.
컵스의 핀스트라이프의 유니폼과 그 거대한 종아리만 뺀다면
아마 그를 보면서 그가 거의 HOFer 의 잠재력이 있다는 평가를는 선수라고
믿을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그가 게임에서 썼던 모자가 eBay 에서 천달러가 넘게 팔렸다는 것에 대해 :
" 좀 우습죠. 누군가 그정도 돈이 있다면 살만한 더 좋은게 얼마나 많은데요. "
뤼글리필드에서의 낮경기에 대해서 물어봤을 때 :
" 낮경기 좋아요. 마치 9시에 출근해서 5시에 퇴근하는 보통 직업을 가진 것 같은
느낌을 주니까요. "
자신의 딜리버리의 매력에 대해 물어봤을 때 :
" 제 매카닉스가 대단히 미학적인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그걸 멋진거라고 생각한다면 좋지요.
타자들을 아웃시킬 수 있는 한 별 신경 안씁니다. "
하지만 단 한가지 토픽에서 그는 좀 달라보였다.
그에게 완벽한 패스트볼을 던지는 것은 어떤 느낌이냐고 물어보자
그는 몇분을 내리 얘기했다.
" 오케이.. 이렇게 얘기하면 좋은 답변이 될 것 같군요.
우선 포수의 사인을 받아요. 그리고 딜리버리에 들어가죠.
온몸이 그 하나에 집중하는거예요.
대개 저는 공을 릴리즈하는 순간 그게 잘 던진건지 아닌지 알게 됩니다.
볼이 손을 떠날때의 그 느낌으로 알 수 있는거죠.
그리고 한 0.5 초 정도 저는 시야에서 볼을 놓칩니다.
그건 제가 그 피치와 분리되는 아주 짧은 순간이죠.
하지만 걱정하지는 않아요. 왜냐면 벌써 잘 되어가는지 아닌지 알고 있으니까요.
그래도 저는 다시 재빨리 공을 눈으로 쫓습니다.
그러면 공의 궤적과 방향과 포수의 미트까지 들어가는 각도를 볼 수 있죠.
공이 포수의 글러브에 들어갈 때 나는 소리를 들을 필요는 없어요.
거기 도착하기 전에 이미 좋은 피치인지 여부를 알 수 있으니까요. "
양키즈가 시카고에 도착하기 전 그들의 수뇌부는
프라이어가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 그와 계약하지 못했던 것이 실수였다는걸
인정하고 있었다.
양키즈의 부사장인 고든 블레이크리는 뉴욕 데일리 뉴스와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 우리는 계약문제를 참 서투르게 처리했습니다.
협상 막판에 충분하지 못한 금액을 오퍼했고 그는 대학으로 갔죠.
그는 지금 컵스가 아닌, 양키즈 선수여야했습니다. "
그러나 지금, 프라이어는 위기를 겪고 있다.
양키즈는 6회말 투아웃에 주자 한명이 나가 있고 컵스의 리드는 6 대 3 으로 좁혀져있다.
프라이어에겐 삼진이 필요했다.
대타 버바 트래멀이 타석으로 걸어나왔다.
프라이어는 잠시 눈을 감았다.
마음으로부터 vision 이 찾아왔다.
그리고 몇초 후 버바 트래멀이 삼진으로 물러나면서 상황은 끝났다.
6회까지 모두 열명의 양키즈 타자가 삼진의 희생자가 된것이었다.
관중들은 거의 광분 모드였다.
이후 컵스의 불펜은 흔들거렸지만 이 22 살의 대단한 투수를 위해 리드를 지켜줬고
그의 시즌 성적은 7 승 2 패가 되었다.
경기후 관중 3만 9천명이 뤼글리필드를 빠져나가는데는 30분이 더 넘게 걸렸지만
양키즈 팬이든.. 컵스팬이든 그 누구도
프라이어가 마운드에 올랐던 그날
그렇게 시간 걸리는거에 열받아하는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투구전 로진백을 만지고 있는 마크 프라이어.
그는 또한 미남이다 !
다음 아래는 mlbbada.com에서 활동하시는 양아치스님의 글이다.
작년에 컵스게임보면서
베이커 밑에 있으면 프라이어는 3년안에 망가질것이라 생각했는데
마침 투어에 저랑비슷한 생각을하신분이 명칼럼을.............
마크 프라이어와 투구수
95마일의 강속구가 홈플레이트 양쪽으로 핀포인트 컨트롤 되는 투수는 몇해전까지만 해도 페드로 마르티네즈 밖에 없었다. 그러나 이제 페드로 마르티네즈라는 이름보다 마크 프라이어라는 23살의 이 겁없는 영건을 대부분의 사람들이 언급하고 있다.
베이스볼 프로스펙투스의 한 칼럼에선 마크 프라이어를 야구계의 10대 보물중 하나로 선정했을 만큼 마크 프라이어는 최고의 자질을 지닌 선수중 한명이다. 더스티 베이커도 이와 같은 사실을 잘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더스티 베이커가 작년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선발투수는 승리를 위해 7이닝정도는 던져줘야 한다.'고 밝혔는데, 이는 마크 프라이어의 앞날을 생각했을때 대단히 위험스런 발언이 아닐 수 없다.
더스티 베이커가 선수생활을 할 당시에는 7이닝이 아무렇지 않은 단어였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지금 이 7이닝이라는 단어가 가지는 위험도는 더스티 베이커의 이팔청춘시절과는 매우 다르다. 투수들의 부상에 가장 깊은 연관이 있는 단어는 혹사라는 두 글자 일 것이다. 그럼 마크 프라이어는 혹사를 당했을까. 100년전의 투수에 비하면 혹사란 단어를 내뱉기에 매우 부끄러운 투구이닝을 마크 프라이어는 지니고 있다.
그러나 투수들의 부상은 과도하게 많은 투구이닝 보다 집중된 투구수가 더 중요한 요인이 될 수도 있다. 투구이닝도 물론 중요하다. 그러나 최근엔 많은 투구이닝이 부상을 일으킨다는 일반적인 생각 때문에 마이너리거들에겐 왠만해선 200이닝을 부여하지 않으며 기량이 검증된 신인급이라 할지라도 200이닝이상은 거의 던지지 않는다.
반면에 투구수는 그렇지가 않다. 감독들과 투수코치들은 투구이닝은 갈 수록 줄여주지만 이닝당 투구수와 게임당 투구수 같은 집중된 혹사에 관해서는 아직 그렇게 세심하지가 못하다. 하늘높은 줄 모르고 치솟는 타자들의 홈런 갯수와 더불어 게임당 투구수, 이닝당 투구수 같은 집중된 투구수 역시 시대가 지날수록 많아 지고 있는 것이 오늘날의 야구판 흐름이다. 그리고 마크 프라이어는 이러한 시대적 감안을 한다면 과거의 어떤 뛰어난 영건들 보다 투구수의 중압감에 눌리고 있다.
투구수에 관한 의문
필자가 과거의 투수들에게 가장 큰 의문을 가지고 있는 점은 샌디 쿠팩스 같은 투수들이 어떻게 해서 300이닝 이상을 던질수 있었을까란 의문이다. 알다시피 샌디 쿠팩스는 선수생활 당시부터 팔꿈치 부상으로 고생을 하고 있었지만 300이닝이 넘는 투구이닝을 기록한 적도 있었다. 그리고 사이영이나 월터 존슨은 어떻게 그런 터무니 없이 많은 투구이닝을 소화해내도고 오랫동안 선수생활을 할 수 있었을까.
이런 몇가지 의문속에 내린 결론은 크게 1. 타자들의 평준화 2. 투수들의 전력투구 이 두가지로 생각해 낼 수 있었다. 이런 생각을 가지게 된 요인은 국내프로야구에서 너구리로 통하던 장명부의 엄청난 투구이닝과 그에대한 인터뷰를 보고 난것이 계기가 되었다.
장명부의 83시즌은 30승 시즌으로 유명하지만 더 놀라운 사실은 장명부의 투구내용이다. 무려 427.1이닝의 투구이닝과 투구수 5886개는 지금으로선 상상조차 가지 않는 엄청난 기록이다.(경기수가 더 많은 메이저리그에서도 80년의 스티브 칼턴 이후 300이닝을 돌파한 투수는 아무도 없다. 그리고 1905년의 조 맥기니티 이후 400이닝이상 던진 투수는 존재하지 않는다.)
허나 이와 같은 괴력의 기록 뒤에는 바로 완급투구라는 비밀이 존재하고 있었다. 당시 일본프로야구에서 역수입된 장명부는 초창기 막 첫걸음을 내딛던 국내프로야구 타자들 보다 분명 한수위의 기량을 지니고 있었다.
이와 같은 사실을 잘 알고 있던 장명부는 하위타자나 수준미달인 타자들에겐 집중해서 던지지 않다 강한 타자들에게만 전력승부를 하는 철저히 체력안배를 가져가는 투구스타일로 일관을 했다. 그러나 지금의 국내프로야구는 그 실력이 상당히 평준화되어 수준미달의 타자들은 이제 프로야구선수 그자체가 되지 못하기에 이런 투구는 불가능할 것이다.
메이저리그도 마찬가지다. 1920년대의 베이브 루스는 야구사에 영원히 이름을 남길만할 강타자였을 것이다. 그러나 당시엔 리그평균에도 훨씬 못미치는, 현대야구에선 메이저리그에 손도 못 내밀 그저그런 타자들이 수두룩 했다는 것이다. 당시의 대투수들은 베이브 루스나 루 게릭 같은 강타자들에겐 혼신의 힘을 다 했음이 분명하다. 그러나 그저그런 타자들에게도 그럴 필요가 있었을지에는 의문이 든다. 이는 야구 초창기 시대에 볼 수 있는 선수자질의 불균형에서 오는 결과였을 것이다.
다음과 같은 통계를 보면 쉽게 이해할 수 있다. 1950년도 네셔널리그의 평균 ops와 작년 네셔널리그의 평균 ops는 매우 비슷하다. 그러나 타자들의 ops 분포도는 그렇지가 않다.
투수를 제외한 90ab이상의 타자들을 상대로 조사한 결과 아래와 같은 분포가 나타났다.
1950년 ops 1.000이상 -1명
ops .900이상-10명
ops .800이상-17명
ops .700이상-28명
ops .600이상-40명
ops .600미만-12명
리그평균 ops .733
2003년 ops 1.000이상 -6명
ops .900이상-17명
ops .800이상-49명
ops .700이상-76명
ops .600이상-53명
ops .600미만-18명
리그평균 ops .744
리그 평균 ops는 비슷한 수준이다. 그러나 1950년도엔 ops .600대나 그이하의 타자들이 전체의 절반정도인 48%의 비율을 차지한 반면 2003년도엔 32% 밖에 되지가 않는다. 이는 달리 말하면 쉽게 처리할 수 있는 타자가 그 만큼 줄어들었다는 것이다. 만약 같은 수준의 ops로 구성된 타순이라 할 지라도 1950년도의 타순은 하위타선과 상위타선의 그 격차가 크기 때문에 하위타선은 적은 투구수와 더 쉽게 처리 할 수 있는 반면 지금 현재의 타순은 그 실력이 균일하게 포진되었기 때문에 투구수 관리에도 곤란하게 된다.
이는 과거로 갈 수록 더 편차가 커지며 현대야구로 접근 할 수록 타자들의 전체적인 기량은 평준화 되고 있다.
이를 또 잘 반영하는것이 야구사학자들의 다음과 같은 주장이다. 야구사학자들은 1960-70년대 이후론 메이저리그 평균 구속은 거의 늘지 않았으며 패스트볼의 평균구속은 대략 80마일 중반대라고 말한다. 그러나 1960년대 그 이전엔 패스트볼의 리그평균 구속은 80마일 초반대라고 주장한다. 이는 투수들의 체격이 좋아졌다는것과 체계적으로 발전한 훈련도 한 몫하겠지만 갈 수록 평준화 되고 있는 타자들을 상대로 투수들이 보다 더 전력투구를 한다는 의미로도 볼 수가 있다.
타자들의 평준화, 그에따른 투수들의 일구일구 마다 더해지는 전력투구에 따른 어깨와 팔꿈치에 대한 무리가 오늘날의 투수들을 약골처럼 보이게 만드는 트릭일지도 모른다. 샌디 쿠팩스는 그 아픈 팔꿈치로도 300이닝이상을 던졌지만 당시엔 샌디 쿠팩스의 공을 치는건 꿈에서나 가능한, 엄밀히 말하면 메이저리그 수준에 미치지 못하는 타자들이 존재하고 있었다.
이들은 실력이 없는 투수들에겐 안타를 빼앗아 타율과 홈런을 기록할 수 있었겠지만 쿠팩스나 기타의 대투수들을 상대로해선 애로사항이 꽃피는 상황을 맞이 했을 것이다. 그야말로 '밥' 이 단어가 어울리지 않았을까.
쿠팩스나 드라이스데일 같은 대투수들은 이들을 상대로 굳이 중심타선을 상대로 했을시 만큼 강하게 던질 필요도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이런 요건들은 그들이 오늘날의 투수들 보다 더 적은 피로함 속에 더 많은 투구수와 이닝을 던질수 있도록 만들었다.
마크 프라이어의 위험도
그러나 마크 프라이어 같은 오늘날의 투수는 그렇지가 못하다. 그리고 마크 프라이어의 전체 투구수와 게임당 투구수 이 두가지를 보면 마크 프라이어는 리그에서 가장 위험함에 근접해 있는 투수중의 한명이다.
게임당 투구수는 113.3으로 메이저리그 전체에서도 1위이며 타자당 투구수도 4개에 육박할 만큼 혹사의 집중도는 높다. (매덕스 같이 체구가 적은 투수가 오랫동안 리그를 지배할 수 있었던 이유는 매덕스의 게임당 투구수와 타자당 투구수 이런 통계들이 리그 최하를 기록할 만큼 뛰어났기 때문이다. 반면 페드로 마르티네즈는 높은 탈삼진율 때문에 이닝에 비해 많은 투구수로 피로도는 높았다. 둘의 스타일은 틀리지만 집중되는 위험도는 페드로가 훨 씬더 높았으며 그 결과로 페드로는 과거와 같은 모습을 보이지 못하는 것 일런지도 모른다.)
더스티 베이커 감독은 선발투수라면 승리를 위해 7이닝은 던져야 된다고 했지만 메이저리그 전체를 통틀어 선발투수중 평균 7이닝이상을 던져준 투수는 작년 마크 프라이어를 포함해 바톨로 콜론, 마크 멀더등 5-6명 밖에 되지 않았다.
베이스볼 프로스펙투스에서 개발한 투수들의 혹사정도를 알 수 있는 PAP(Pitcher Abuse Points)에서 마크 프라이어는 메이저리그 전체에서 3번째로 혹사를 당한 투수로 언급되었다. 물론 같은 투구수라 할 지라도 투수들에게 동일하게 적용되지는 않는다.
랜디 존슨,커트 쉴링,리반 에르난데스, 바톨로 콜론 같은 경우는 해마다 이 PAP순위의 단골 손님들이지만 그들은 지금까지 잘 먹고 잘 살아 왔었다. 마크 프라이어도 다행히 스카우들이 내린 20-80스케일 평가에서 80을 받을 만큼의 완벽한 투구폼을 지니고 있는 투수다. 그러나 베이스볼 프로스펙투스의 PAP리스트에서 마크 프라이어는 가장 어린 투수며 대학시절에도 NCAA최고에 해당하는 혹사를 당해왔다는 점을 주목해봐야 한다.
이미 USC 3학년시절 18번의 선발등판 가운데 투구수 120개가 넘었던 적이 5회 그중 2회는 무려 130개를 넘겼었다. 당시 마크 프라이어의 나이가 21살 이었다는 것은 치명적이다. 그리고 전년도인 20살에도 이와 비슷한 투구이닝과 비슷한 투구수를 기록했다.
투구수 120개가 가지는 의미는 남다르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120개를 초과하는 것을 매우 위험한 투구수로 생각하는데 이는 통계적으로 보아도 전혀 틀린 말이 아니다. 레니 야자엘리의 조사에 의하면 투구수 120개를 넘긴 투수들의 그후 3주간 피안타율, 볼넷허용율, 실점율 등은 100개 근처의 투구수를 기록했을시 보다 월등히 높아진다는 것을 밝혔다. 이는 1989-1999년까지 10년이 넘게 축적된 통계치를 토대로 행한 자료이다. 120개의 투구수를 초과한 선발등판이 쌓여질 때마다 이런 위험도는 더욱 높아지며 부상의 위험도도 비례한다. 작년 마크 프라이어가 120개 이상의 투구수를 기록한 경기는 10회로 100개 이하를 기록한 경기를 찾아 볼 수 없을 만큼 나이에 비해선 비정상이다.
몇십년 후 마크 프라이어를 생각해 보면 어떤 그림이 그려질지 현재로선 모른다. 그러나 더스티 베이커가 선발투수들의 투구수에 그다지 신경을 쓰지 않고 있다는 것은 확실하다. 샌프란시스코 감독이었던 2002시즌 더스티 베이커는 선발투수들에게 투구수 120+ 경기를 메이저리그에서 가장 많이 부여한 감독이다. NL평균이 7회였던 반면 베이커는 19회나 그런 짓을 저질렀다.
이는 컵스에 와서도 마찬가지다. 케리 우드는 단번에 리그최고의 혹사왕으로 변신했으며 카를로스 잠브라노 같은 영건들도 다른팀이라면 생각할 수 없을 만큼의 투구수 속에서 공을 던지고 있다. 더스티 베이커는 선발투수라면 7이닝은 기본이라고 생각할지 모르나 전미대학 역사상 최고의 투수라는 찬사를 받은, 그리고 드와이트 구든의 신인시절과 비교해도 손색이 없는 활약을 보이고 있는 마크 프라이어를 생각했을때 7이닝을 고집하는건 그리 좋지 만은 않을 것이다.
A.J. 버넷이 부상당하기 전 120+ 투구수를 기록한 선발경기는 마크 프라이어와 같은 10회이다. 그러나 A.J. 버넷의 팔꿈치가 다음해에 박살날줄 알았던 사람은 없었다.
올 시즌 개막과 함께 부상으로 DL에 올랐던 마크 프라이어는 얼마전 무사히 복귀전을 치루었고
얼마전엔 로캣맨 로저 클레멘스의 10연승을 저지하기도 하는등 올해도 최고의 해를 구가하고 있다.
마크 프라이어의 투구를 보고 있노라면 숨이 막혀 아무말도 하지 못한다.
팀에 또 다른 에이스 케리 우드가 있지만 마크 프라이어가 나에게 가져다주는
기쁨을 케리 우드에게서는 찾을 수 없다.
이래서 내가 세상 살 맛이 난다. !!
케이블이나 위성방송의 50개 넘는 채널이 모두 다 하루종일 스포츠만 중계했으면
할때도 있다. 주변에 날 아는 사람들은 틀림없이 결혼하면 아내와 이 문제때문에
싸울거라고 말할 정도로 스포츠를 너무너무 좋아한다.
지금 아픈것도 농구하다가 그랬으니 오죽할까. 그래도 후회는 없다.
다치기 직전까지는 쩰로 기분 좋았으니깐. ^^;
수많은 스포츠 스타중에 가장 좋아하는 스타를 꼽으로고 한다면 정말 난감하지만
한참 고민한 다음에 미국 프로야구 Chicago Cubs의 Mark Prior를 꼽을 것이다.
그는 메이저리그 역사상 가장 안정적이고 아름다운 투구폼을 소유한
선수로 꼽힌다. 야구를 잘 모르는 사람이 봐도 그의 투구폼이 예술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메이저리그에 오기 전부터 그는 전형적인 엘리트 코스를 거친 투수였다.
그리고 지금은 시카고 컵스의 미래를 책임질 영건이다.
아래는 mlbbada.com에서 활동중인 Teddy님의 글이다.
컵스의 구단주이면서 시카고 트리뷴을 소유하고 있기도 한
트리뷴 컴퍼니는 상당한 재력의 언론, 출판 대기업입니다.
그들이 발행해내는 잡지 가운데 Chicago 라는게 있죠.
잡지 이름에서도 눈치채셨겠습니다만 시카고 지역에 관한 잡지로
패션, 스타일, 유명 브랜드, 좋은 식당, 고가의 부동산 등등에 관한 기사들이 들어있습니다.
돈 좀 있는 힙스터들을 대상으로 하는 잡지라고 할 수 있겠지요.
뭐 평소엔 이 잡지 별로 사볼 일이 없는 접니다만
지난 9월호는 챙겨서 한권 샀습니다.
네.. 거기엔 마크 프라이어의 기사가 실려 있었으니까요. 흐히히.
오늘은 그동안 쟁여놨던 이 기사를 전해드립니다.
한국에서는 접할 수 없는 잡지의 기사라서
이거야 말로 시카고 사는 생색을 톡톡히 낼 수 있는거겠네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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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MAN WITH THE GOLDEN ARM 황금팔의 사나이
대단한 약진을 했던 프로 2년째 되는해에 컵스의 투수 마크 프라이어는
강력한 양키즈를 상대했고, 야구계의 가장 큰 스타로 올라섰으며
자신의 올스타시즌을 잠깐동안이나마 주춤거리게 했던, 주루중의 충돌에서도 살아남았다.
lovable losers 라는 이미지의 컵스에서 이상하게 느껴질만큼 빛났던 그의 활약들과
22살이라는 나이가 믿어지지 않는 그 성숙함은
그가 살아온 내내 해왔던 평범하지 않은 준비들의 결과라고 하겠다.
Robert Kurson
올해 6월초.. 뤼글리필드는 1938년 월드시리즈 이래 보지 못했던 방법으로 들썩거렸다.
양키즈가 65년만에 이동네에 왔고 그들과의 3연전 마지막 경기는 이미
올시즌 MLB 경기 가운데 가장 관심을 끄는 경기가 되어 있었다.
프레스박스는 물론 가까운 카페테리아와 복도에까지 수백명의 취재진이 넘쳐났다.
ESPN 은 필드에 스튜디오를 설치해놓고 해설자들과 함께 방송을 진행하는동안
어퍼덱은 사람들의 발 굴림으로 들썩거렸다.
경기가 시작되기 몇분전 하루종일 이어지던 빗줄기가 멈추고
햇살이 내리쬐기 시작했다.
그러자 뤼글리필드를 가득 메운 관중들은 환영의 함성을 질러댔다.
" 햇살은 늘 양키즈쪽에 비춘단 말야.. "
라고 컵스팬이 농담을 하자 한 양키팬은 그말이 정답이야 라고 맞장구를 쳤다.
이런 배경들을 뒤로 하고 컵스의 22살 먹은 투수는 워밍업을 시작했다.
긴장하고 있는 선수들과 방송인들과 팬들로 가득한 경기장에서
그는 유일하게 그런 분위기에 초연한 사람같이 보였다.
3일전 컵스의 덕아웃에서 데블레이스와의 경기를 대비하면서
야구 얘기를 나눌 때.. 엄청난 종아리를 가진 그는 벽에 기대서서 이렇게 말했다.
" 저는 양키즈를 상대하는것과 다른 팀들을 상대하는것들에서
아무런 차이도 느끼지 않습니다. 제겐 템파를 상대로 등판하는것과 같은거죠. "
양키즈의 유격수 데렉 지터를 상대로 어떻게 피치를 할것인가 하는 질문을 받자
그는 이렇게 말했다.
" 아직 모르겠어요. "
그당시 그의 그런 담담함은 극기 차원이 아니겠는가.. 라고 이해해야했다.
그들은 양키즈가 아닌가.. 루스와 게릭, 디마지오와 맨틀같은 전설들의 팀.
그러나 지금 양키즈 선수들이 덕아웃 입구에 서서 자신의 모션을 연구하는 속에서
컵스의 불펜에서 캐치볼을 하고 있는 프라이어는
정말로 자신의 상대가 다른 팀들과 다르지 않다고 믿는 것처럼 보였다.
시카고의 모든 사람들과는 달리 그는 정말 그들이 양키즈라는걸
별로 신경 쓰지 않는 유일한 사람이었다.
첫 타자는 좌중간으로 2루타를 때려냈다.
관중석의 올드 타이머들은 곧 닥쳐올 재앙에 대비한 마음의 준비를 했다.
저 젊은이는 자신이 만든 상황에 감사하지 못할거라고...
프라이어는 어떻게 그토록 무심한채 워밍업을 할 수 있었던거지?
그런 가운데 프라이어는 거의 HOFer 인 지터를 상대하려 다시 마운드에 올랐다.
그리고 삼진으로 그를 돌려세웠다. 다음 타자는 파워히터 제이슨 지암비.
프라이어는 그 역시 삼진으로 아웃시켰다.
이제 이 젊은 투수는 숨을 돌릴 틈을 좀 가지게 된 것이다.
프라이어는 양키즈의 위험한 투수인 호르헤 포사다를 조심스럽게 상대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 대신 그는 포사다를 몸에 맞는 볼로 내보내면서
양키즈의 위협을 살아나게 했다.
타석엔 3루수 로빈 벤추라가 서 있었다.
그러나 프라이어의 표정은 여전히 불펜에서 웜업을 할때와 다름이 없었다.
마치 그와 그의 포수만이 존재하는듯한 분위기.
잠시 후 그는 벤추라를 삼진으로 아웃시켰다.
경기장뿐 아니라 인근 아파트들과 식당에서도 환호들이 터져나왔고
프라이어의 이름이 적힌 저지는 여기저기서 펄럭거렸다.
관중석의 올드 타이머들은 프라이어가 마운드에서 걸어나올 때
기가 막히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그들은 자신들이 새로운 종류로 분류될 운동선수를 보고 있다는 것을 알지 못했던 것이다.
상상도 할 수 없는 색다른 방법으로 오늘을 준비해온 그런 선수 말이다.
그들은 또한 마크 프라이어가 자신만의 독특한 방법으로
이 게임을 위한 웜업을 15살때부터 해왔다는것도 알지 못했다.
1958년 윌맷의 로욜라 아카데미의 라이언 신부는
뤼글리필드를 보러가는 여행을 기획했었다.
그때 참석한 사람들 가운데는 8학년의 제리 프라이어가 있었다.
14살의 나이지만 이미 엄청난 종아리 근육과 대퇴 근육을 가지고 있었던 그는
뤼글리 주변에서 시카고의 풋볼팀인 베어스가 스카웃 하러 올때까지
기다려야할 것 같이 보이는 체격의 소년이었다.
프라이어는 로욜라를 졸업하고 내쉬빌로 향했다.
벤더빌트 대학에서 풋볼을 하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그는 벤더빌트를 졸업한 밀드레드와 결혼식을 올리기 전 샌디에고로 이사했다.
거기서 그는 재정상담가로 일했고 밀드레드는 교육자가 되었다.
그들은 곧 세 아이의 부모가 되었다.
제리 3세, 밀드레드, 그리고 1980년 9월 7일 태어난 마크라는 이름의 아이..
이렇게 셋이었다.
프라이어네 세아이는 모두 제리의 운동신경 유전자를 이어받은 듯 보였다.
그들은 농구와 테니스와 야구에서 두드러진 재능을 보였다.
가정에서 어머니 밀드레드는 교육을 스포츠의 전제조건으로 만들었고
그 결과 아이들은 공부에서도 A 학점들을 받아왔다.
프라이어네 아이들이 경기에서 두각을 나타내면서
제리는 자신의 아이들을 위한 가장 정제된 운동 교습을 준비하고 또 연구했으며
상당한 금액을 지불하면서 코치와 트레이너를 고용했다.
이런 모든 것은 일반적인 이유들때문은 아니었다.
대부분의 많은 부모들이 자신의 아이들의 경기와 기록에 사로잡혀 있는동안
제리는 단 한가지에만 집중하고 있었다.
균형과 컨디션 같은 것에 대한 좋은 매카닉스가 바로 제리가 집중한 유일한것이었다.
" 아버지는 저를 프로 운동선수로 키우기 위해 훈련 시키신건 아니었어요.
아마 그건 아버지의 마음속에서 가장 뒤쪽에 밀려있는거였을겁니다.
모든 훈련들은 다음 단계로 올라가거나 이기기 위한 것들은 전혀 아니었죠.
언제나 제대로 된 가르침과 폼의 교정에 관한것들이었어요. "
라고 프라이어는 말했다.
아버지인 제리 프라이어는 이런 얘기를 한다.
" 아이들에게 가장 중요한건 올바른 테크닉을 가지게 하는거라고 우리는 믿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다치거나 , 스포츠의 한 부분이 될 수도 있는 약물 오용의
대상이 되지 않도록 하는걸 확실히 하고 싶었죠. "
15 살때 마크는 들쑥날쑥한 패스트볼을 던지는 호리호리한 투수였다.
고등학교때 한 게임에서 그는 9점 이상을 내줬었다.
그날 관중석에는 자신의 아들을 응원하려고 왔던 탐 하우스 Tom House 가 있었다.
예전 메이저리그 투수였고 또 피칭 코치였으며
놀란 라이언이나 랜디 존슨 같은 위대한 투수들을 연습시켰던 바로 그 탐 하우스였다.
하우스의 교습방법은 정통적인 것은 아니라는 얘기가 있었는데
패스트볼을 던지는 젊은 투수들에게 그는
"기능적 힘" 이나 " 좌우 양측 시스템 " 같은 개념을 말하곤 했다.
그는 심리학 박사 학위를 가지고 있었고 또 다른 네 개의 학위도 가지고 있었으며
다가오는 밀레니엄을 엘리트 운동선수들을 위한 신시대라고 말하는 영약학자였다.
그날 그 게임이 끝난 후 제리 프라이어는 하우스에게 다가가서
자신의 아들을 도와줄 수 있는지 물어봤다.
" 우리가 할 수 있는건 참 많을겁니다. 하지만 매카닉스에서부터 시작하죠. "
라고 하우스는 대답했다.
컵스는 1회말 양키즈를 상대로 석점을 뽑아냈다.
프라이어는 이제 어느 정도의 쿠션을 가지게 된 것이다.
그러나 2회초 라울 몬데시는 2루타를 쳤고
프라이어는 그날 자신의 두 번째 HBP를 기록하며 히데끼 마쓰이를 내보냈다.
양키즈의 위협이 다시 시작된것이었다. 노아웃 주자 1,2루.
하지만 프라이어의 표정은 아직도 변하지 않고 그대로였다.
그는 경기에 집중했고 후안 리베라에게서 병살타를 뽑아낸 다음
앤디 페팃을 삼진으로 처리했다.
그러자 관중들은 더 커다란 함성을 질러댔다.
2이닝동안 삼진 네 개. 마크 프라이어는 양키즈를 묶어놓고 있었다.
하우스는 15살의 프라이어와 함께 어디서부터 시작해야할지 감이 잘 잡히지 않았다.
녀석은 키가 크고 마른 편이었다.
하우스는 그때 프라이어를 ' 귀가 달린 연습용 배트 ' 같았다고 표현하면서
이렇게 당시를 회상했다.
" 다듬어지지 않은 재능이 있었어요.
하지만 마크는 딜리버리를 같은 폼으로 반복하지 못했죠.
집중하는 능력 역시 그리 대단하지 못했어요.
그러나 한가지는 정말 저를 놀라게 했죠.
15살의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그 아이는 목표 달성에 있어서만큼은
무서울 정도로 남달랐습니다. "
하우스는 자신의 철학을 펼쳤다.
그는 프라이어에게 모든 엘리트 운동선수들은
매카닉스, 근력, 신진대사, 정신-정서적 영역..
이렇게 네가지 카테고리에서 다른 사람들보다 뛰어나다는 얘기를 했다.
프라이어의 매카닉스는 훌륭했으나 그는 피칭 모션을 계속 반복하기 위한
근력이 부족했다.
또한 그의 신진대사는 식이요법과 운동요법등을 통해 개선될 여지가 많았다.
정신-정서적 부분은 야구와 인생에 대한 오랜 대화 끝에 결론이 나왔다.
이 네가지는 각각 상호작용을 할 수 있는것이었다.
프라이어는 하우스의 가르침을 철저히 따랐다.
얼마 지나지 않아 아버지에게서 물려받은 커다란 종아리와 대퇴부 근육은
홈플레이트를 향해 공을 뿌릴 때 엄청난 폭발적인 추진력을 만들어내는
원동기 역할을 하게 되었다.
웨이트 트레이닝과 적절한 영양섭취는 프라이어의 하반신의 지구력을
최고조로 끌어올렸으며 이것은 프라이어가 다리 동작을 반복해서 할 수 있도록 만들었다.
하우스는 프라이어에게 자신이 봤던 위대한 투수들에 대한 얘기를 해줬다.
랜디 존슨은 어땠는지, 놀란 라이언은 경기 시작 전까지 자신의 마음을 비워서
경기에 침착하게 임할 수 있도록 어떻게 준비를 했는지에 대한 것들이었다.
프라이어는 그 모든 가르침을 받는대로 집어삼켰다.
" 그는 내가 가르쳤던 그와 비슷한 나이 그룹의 투수들 가운데
가장 재능있는 투수는 아니었습니다.
더 강한 볼을 던지고 또 웨이트룸에서 더 무거운 걸 들어올리는 아이들이 있었죠.
하지만 나는 그녀석만큼 내 계획의 네가지를 다 발전시킨 녀석은 본적이 없습니다.
어린 나이부터 그는 내가 야구계에서 알고 있는 그 누구보다도
네가지 부문의 최고 조합이었어요.
그는 코칭 과학이나 의료 과학의 최첨단 연구가들이 30년간 모아온 결과들,
그런 최신 연구결과가 반영된 대표적 인물이 되어가고 있었습니다. "
라고 하우스는 말한다.
마크가 하우스와 훈련하는동안 제리 프라이어는 자신의 아들에게
또다른 비전통적인 방법을 제시했다.
짐 브로갠 Jim Brogan 은 샌디에고 클리퍼스를 위한
국내 농구연맹에서 뛰었으며
현재는 널리 인정받는 청소년 농무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었다.
브로갠의 접근방식은 농구에 대한 것 만큼 인생에 대한것이기도 했다.
그런 개념이 제리 프라이어의 마음을 끄는 요인이었다.
그리고 이제 마크의 차례였다.
브로갠은 아직은 자신이 하고 싶은 운동이 어떤건지,
야구인지 농구인지가 확실하지 않은 어린 프라이어와 훈련을 해나갔다.
브로갠은 마크에게 미래에 이루고 싶은 목표의 리스트를 만들어보라고 했고
곧 10 단계 성공 프로그램을 시작했다.
그러는동안 그는 대개의 10 대 아이들이 흘려보내기 쉬운 것들을
젊은 운동선수에게 요구했다.
자유투 연습을 하는동안 브로갠은 프라이어의 면전에 서서
소리를 지르고 손을 흔들어댔다.
당시 브로갠이 프라이어에게 했던 이야기.
" 우리는 게임 상황을 연습해야해. 너는 게임이 시작되기 오래 전부터
정신적으로 준비가 되어 있어야한다구. "
처음에 프라이어는 그런 어수선함속에서는 공을 던지지 못했다.
하지만 셀 수 없는 반복이 이어지고 난 후 프라이어는
마치 혼자 체육관에 있는것처럼 공을 집어넣기 시작했다.
그 연습은 충분히 이성적인것이었다.
그러나 브로갠에겐 이제 막 시작한것에 불과했다.
그는 다음 단계로 프라이어에게 눈을 감고 자유투를 쏘라고 지시했다.
그당시 프라이어는 6 피트 5인치, 225 파운드인 지금 체격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그러니 게임 상황에서는 슬램 덩크도 하고 남을 체격인데
그런 그가 정말로 눈 감고 경기하는 연습이 필요했을까?
브로갠은 프라이어에게 이런 말을 했다.
" 단순한 시각(sight)은 눈에서부터 오겠지만 통찰력(vision)은 마음에서 오는거야.
최고의 운동선수들은 마음으로 사물을 보는거다. "
프라이어는 눈을 감았다. 그리고 그가 던진 공은 백 보드를 완전히 벗어나는것이었다.
그런 결과는 계속 이어졌다.
하지만 그는 쉬지 않고 연습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보지 않고도 자유투를 성공시킬 수 있었다.
브로갠은 프라이어에게 팔을 두르고는 이렇게 물었다.
" 자아.. 이제 나에게 말해보렴. 야구에서 공을 던질 때 왜 눈을 뜨고 있어야하지? "
프라이어는 이런 질문을 받고는 웃어버렸다. 브로갠은 당시를 이렇게 회상했다.
" 하지만 그는 그것에 대해 생각하더군요. 저는 절대 잊지 못할겁니다.
그가 그 문제를 생각하는 모습은.. 정말 직접 봤어야해요. "
어느날 브로갠은 자신의 학생들을 불러모으고는
그들에게 스포츠는 리듬의 게임이라는 것을 인식시켰다.
엘리트 선수들의 내면에는 음악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그는 학생들에게 그들이 그런 것을 보여줬으면 한다고 말했다.
아이들은 조용해졌다.
브로갠의 말은 이어졌다.
" 나는 너희들이 하나 하나씩 혼자서 여기 올라온다음
그룹 앞에서 춤 추길 바래. 음악은 없다. 그저 너희들과 너희들 내면의 리듬뿐이지.
운동선수로서 여기 올라와서 춤을 추거라. "
브로갠은 당시를 회상하며 이런 얘기를 했다.
" 그것은 리듬이 스포츠에서 어떤 의미가 있는지에 대한 교훈이면서
아이들의 용기에 대한 테스트였습니다.
레이커스를 상대로 시간이 남지 않은 상태에서 자유투를 쏠 때
그땐 자기 자신에게 대답할 수 있어야하니까요. "
프라이어는 앞으로 나왔다. 누구도 입을 여는 사람은 없었다.
그는 지금 컵스의 동료들이 그를 묘사하는것과 거의 다름 없이
당시에도 조용하고 수줍은 소년이었다.
춤추는 것은 그와는 별 상관 없는것이라는게 맞는 말일거다.
어쨌든 그는 몸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자유형식..의 마치 스파게티 가락이 움직이는듯한 춤이랄까..
사실상 리듬감하고는 거리가 먼...
운동선수들이 옆선수를 웃기려고 할때나 할만한 동작들이었다.
" 그는 모든 아이들 앞에서 춤을 췄습니다.
그 춤이 어땠냐구요?
솔직히 말해서 녀석은 리듬면에서는 배워야할 부분이 많았습니다.
하지만 그는 내가 가르치려고 한걸 이해하고 있었죠.
겨우 11학년이었는데도 그는 그 위에 나와서 춤을 추는것과
뤼글리필드에서 양키즈를 상대로 공을 던지는것의 연관성에 대해 이해하고 있었어요."
3회쯤부터 프라이어는 자신의 리듬을 찾아가기 시작했다.
그는 지암비에게 홈런을 허용했지만 3회에 삼진 두 개를 잡아냈고
4회에 역시 삼진 하나를 추가하면서 양키즈에게 점수를 허용하지 않았다.
5회초.. 그는 세명의 타자를 삼진으로 잡아냈으며
그 후 또 두명을 삼진으로 돌려세웠다.
컵스는 6 대 1 로 이기고 있었고 프라이어는 5회까지 삼진 아홉 개를 기록했다.
프라이어가 필드에서 걸어나올 때...
언제나 양키즈를 비춘다는 태양은 관중석 뒤쪽으로 뉘엿뉘엿 지고 있었다.
프라이어가 마운드를 제압하던 고등학교 졸업반 시절..
프로 스카웃들은 그를 주목했다.
그리고 양키즈는 1998년 겨우 17살이었던 그를 드래프트했다.
협상은 몇주동안 이어졌다. 여러 가지 사항들을 놓고 밀고 당기기를 하고 있던 당시
제리 프라이어는 자신의 아들의 변화를 봤다.
" 마크는 친구들과 시간들을 보내기 시작했죠.
그들 모두는 대학에 진학할 계획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고등학교 졸업반을 즐기기 시작한 마크는 대학생이 되는건 어떨까.. 하는
느낌을 가지기 시작했던 것 같아요. "
결국 양키즈는 프라이어에게 계약금으로 $1.64M을 제시했다.
고등학교 졸업예정자 가운데 최고의 금액이었다.
제리 프라이어는 아들과 얘기를 했다.
그 당시를 회상하는 제리.
" 그 과정 내내 우리는 마크에게 말했죠.
' 네 결정이 어떤것이든간에 돈이 그 결정의 바탕이 되지는 않게 해라.
만약 네 인생의 첫 결정을 돈을 바탕으로 내린다면
그 이후엔 돈이 너의 남은 인생 전부를 지배할테니까.
그러니 돈은 제껴놓고 나머지 부분에서 장단점을 비교해보렴. '
이라고 말입니다. "
마크는 쉽게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던 그는 돈 없이 대학 캠퍼스에서 지내는 자신과
돈 없이 양키즈 팜 시스템에 있는 자신을 상상해봤다.
그렇게 시간이 지나고 아버지가 그에게 이젠 결정을 내릴 시간이라고 말했을 때
마크는 양키즈의 브라이언 캐시맨 단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리고는 매우 정중하게 " No, Thanks " 라고 말했다.
" 저는 학교에 가서 대학생활을 즐기고 싶었습니다.
루키볼에 가고 버스로 여기 저기 여행하고 싶지는 않았어요.
그정도의 돈은 정말 좋은거지만.. 저는 대학을 원했지요. "
프라이어는 자신의 부모님이 졸업한 밴더빌트를 선택했다.
학교팀에서 투수로 지내면서 그는 4승밖에는 올리지 못했으며
여덟 번의 패배를 기록했다.
9이닝당 방어율은 평범한 수준인 4.59 였다.
그 시즌 후에 프라이어는 집에서 가까우며
1년내내 야구를 할 수 있는 날씨대에 있는 학교인 USC 로 옮겨갔다.
그런 이동은 그를 바꿔놓았다.
대학 2학년때.. 그는 10승 7 패에 방어율 3.56을 기록했으며
팀의 삼진 부문 선두를 달렸다.
팀 동료들은 그에게 "Calfzilla" 라는 별명을 붙여줬다.
엄청난 사이즈와 힘을 가진 그의 종아리 calves 때문이었다.
- calf 와 고질라의 합성어겠죠. 히힛
귀걸이도 하지 않고 문신 하나 없었지만 누구보다 빛나보인 그는
바지도 예전 선수들이 했듯 무릎 아래까지 올려입었다.
" 19 살의 나이에... 생각하는건 무진장 노티나는 녀석이었어요. "
대학 시절 코치 마이크 길레스피는 그를 이렇게 기억했다.
" 그는 과거로의 회귀였죠. 꿈이 이뤄지는 것 같았습니다. "
- 크하.. 이 양반 요즘 선수들 옷입는 방식이 어지간히 짜증났었나부죠?
하긴 뭐.. 저도 이점에는 길레스피 코치랑 생각이 같으니.. 흐...
2학년이 끝나고 프라이어는 길레스피가 코치를 맡고 있던 USA 대표팀에 합류했다.
유혹들이 가득한 것으로 유명한 도시의 밤거리와 또 그걸 즐길 기회가 넘치는
암스텔담에서 열리던 국제 토너먼트에서
그는 만명의 열광하는 팬들이 보는 가운데 쿠바의 최고팀을 두 번이나 잡아버렸다.
길레스피는 당시를 이렇게 얘기했다.
" 거의 기묘한 수준이라고나 할까요.
무슨 일에도 흔들리지 않으면서 자기자신다운 모습을 유지하고
또 자신의 스터프를 믿는 그 딴세상인간같은 능력을 마크는 가지고 있었습니다.
지금 사람들이 보는게 바로 그거죠.
그는 자신이 처한 상황에 전혀 영향 받지 않습니다.
그당시 선수들 수준이나 나이등을 감안해보면
마크의 그런 모습은 거의 믿을 수 없을 정도였습니다.
자신감과 꾸준함에 있어서 그는 정말 대단했습니다. "
지금 미국 야구팀을 총지휘하는 스티브 코헨은 또 이렇게 말했다.
" 침착함과 감정의 절제에 있어서 그는 대단히 독특합니다. 거의 비정상에 가깝죠.
그 집안에 뭔가 비법이 있는 것이 확실해요.
그것 말고는 제가 본걸 설명할 길이 없어요. "
코헨은 프라이어의 커리어에서 또 하나의 전환점이 된 일을 얘기해줬다.
암스텔담에서의 토너먼트때 있었던 일이다.
프라이어는 잘 던졌지만 한국팀에게 1 대 0 으로 패했다.
-자책점은 아니었다고 하는데.. 당시 한국 대표팀 멤버들이 누구였는지 모르겠습니다
" 그는 그렇게 잘 던져놓고 졌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데 좀 힘들어했고
자신에 대한 회의도 좀 느끼는 듯 했습니다.
자신이 던졌던 피치 가운데 한두개 정도 맘에 안들던 피치를 계속 생각하고 있었죠.
그런데 그때 마크의 형이 결혼식을 올렸습니다.
그래서 그는 1주일 휴가를 받아서 결혼식에 참가하고 왔죠.
1주일동안 야구를 떠나 있었던겁니다.
그런데.. 그렇게 다녀오기 전에도 그는 정말로 멋진 피칭을 보여줬었는데
다녀온 다음에는 뭐랄까 또 완전히 다른 사람같은 느낌을 줬습니다.
그를 상대로는 그 누구도 이길 가능성이 없었죠. 아예 공에 손도 못대더군요.
저는 그 1주일간의 시간동안 대체 무슨 일이 그에게 일어났는지 모릅니다만
아 정말... 그는 언히터블이었어요.
저는 그 누구도 그런 수준으로 공을 던지는걸 결코 본적이 없습니다.
챔피언쉽 게임의 1회에서 그는 95 마일짜리 공을 던졌죠.
3번 타자가 네 개의 패스트볼을 치긴 하는데 파울밖엔 안되더군요.
그리고 마크는 악마같은 커브볼을 던졌습니다.
타자는 그저 거기 서 있을 뿐이었죠. 움직이지도 못하더군요.
그건 마치 마크가 이렇게 말하는 것 같았습니다.
' 넌 끝났어 ' 라구요.
그가 던진 그 커브볼... 그건 그날 제가 봤던..
정말 평생 기억에 남을 아름다운것이었습니다. "
사람들은 아직도 프라이어가 어떻게 SC 에서의 첫해를 그렇게 해냈는지 잘 알지 못한다.
그는 15승 1패, 방어율 1.69를 기록했고
139 이닝의 투구동안 삼진 202 개를 잡으면서 볼넷은 18 개만을 내줬다.
11 대 1 이라는 이런 삼진/볼넷 비율은 어디서 듣도 보도 못한것에 가까운 것이다.
그해 전국의 모든 스포츠관련 출판물들은 그를 올해의 선수로 선정했다.
베이스볼 어메리카는 그를 역사상 최고의 대학선수라고 불렀다.
그런 모든 일들이 벌어지는동안 마크 프라이어는 탐 하우스, 그리고 짐 브로갠과 함께
연습하고, 게임을 연구했고, 컨디션을 조절했고, 무진장 준비했고, 리듬을 익혀갔고,
sight 와 vision 의 차이를 심사 숙고했다.
그리고 자신의 경영학 학위를 향한 높은 학점들을 얻어나갔다.
그러나 궁극적으로 이 학위는 좀 더 기다려야하는 것이 되었다.
당시 스카웃들은 침을 흘리고 있었으며
프라이어는 국내에서 최고의 드래프트 유망주로 꼽히고 있었다.
그리고 결국 그를 드래프트하는 그 멋진 순간은 컵스에게 돌아갔다.
미네소타 트윈스가 자신들의 퍼스트 드래프트 픽으로
그동네 출신 포수인 조 마우어를 선택했기 때문이었다.
컵스는 내립다 달려들어서 그와 계약했다.
5년 $10.5 M 라는 그의 계약은 아마추어 사상 가장 큰 것이었다.
브롱스에서.. 조지 스타인브래너는 가슴에 쓰라린 통증을 느꼈을테지.
-트윈스가 더 아까운거 아닌가.. 싶으실지 모르겠는데요.
그넘의 짠돌이 구단주로서는 저런 돈은 꿈에서도 생각못할테고..
그러니 픽해놓고 계약 못해서 날리는것보다 차라리 저쪽을 택한거겠지요.
구단주가 부자면 뭐해.. 쯔쯧.
6 대 1의 리드를 유지한채 6회초에 들어서면서 프라이어는 양키즈의 첫 두타자를
대미지 없는 플라이 아웃으로 처리했다.
그러나 라울 몬데시는 좌측으로 홈런을 날렸고
이어 타석에 나선 히데끼 마쓰이는 좌중간으로 2루타를 쳐냈다.
그리고 후안 리베라가 안타를 치면서 마쓰이는 홈에 들어왔다.
갑자기.. 프라이어의 리드는 6 대 3 석점 차로 줄어들어 있었다.
뤼글리필드의 양키즈 팬들은 주먹을 휘두르며 함성을 질러댔다.
-아무래도 필자가.. 저를 본게 아닌가 싶습니다 -_-;;;;
그날 양키즈 저지 입고 이 경기 갔었거든요..
위기에 처한 프라이어... 타석엔 버바 트래멀이 대타로 나왔고
그날 처음으로 프라이어의 표정이 변해있었다.
컵스에서의 첫 번째 등판은 화이트삭스와의 스프링 트레이닝 경기때였다.
그는 3이닝동안 삼진 일곱 개를 잡아냈다.
화이트삭스의 제리 매뉴엘 감독은 그의 스터프를 커트 쉴링에 비교했다.
겨우 21살의 나이인 프라이어를 말이다.
컵스는 프라이어를 마이너로 보냈다. 처음에 그가 간곳은 더블 A 웨스트 테네시였고
다음은 트리플 A 아이오와였다.
엄청난 군중들이 이 대단한 녀석을 위해 몰려들었다.
중부지구에서 허우적거리던 컵스가 그를 불러올리기 전까지 머물렀던
이 두 레벨의 마이너팀에서 그는 도미넌트한 투수였다.
파이리츠를 상대로 한 그의 메이저리그 데뷔전을 보기 위해
뤼글리필드에는 구름같은 관중이 몰려들었고 매진 사례를 기록했다.
-저도 이 경기 보러 갔었습니다. 아이고 그 표 구하느라고 어찌나 고생했는지
프라이어는 6이닝동안 열명의 타자를 삼진으로 돌려세웠으며
파이리츠에게 7 대 4 로 승리했다.
다음날 워싱턴 포스트는 프라이어가 긴장한 기색이라고는 찾아볼 수가 없더라고 보도했다.
탐 하우스 역시 놀라지 않았다.
그는 사람들에게 프라이어는 이미 그 게임을 15살때부터 준비해왔다고 말했다.
프라이어는 컵스에서의 2002년 시즌을 6승 6패 방어율 3.32 로 마감했다.
-에휴 불쌍한 녀석.. 팀이 구리해서 쩝...
그는 117 이닝 가까이 던지면서 147명의 타자들을 삼진 시켰는데
1이닝당 평균 삼진수는 엄청난 것이었다.
오프시즌 그는 탐 하우스와 함께 계속 훈련을 해나갔다.
또한 배낭을 어깨에 메고 USC 캠퍼스로 경영학 수업을 들으러 갔다.
마케팅 클래스를 위해 그는 어떻게 애나하임 에인절스 같은 낮은 페이롤 팀이
양키즈 같은 엄청난 페이롤팀을 상대로 살아남을 수 있었는가를 분석한 리포트를 썼다.
" 경영학 학위를 따려면 아직도 클래스를 두 개 더 들어야해요.
2003년 시즌이 끝난 다음에 할겁니다. 그리고 똑같은 배낭을 쓸거예요. "
겨울동안 프라이어는 링컨 팍에 타운하우스를 사서
시카고의 집으로 삼았다.
지난 3월 스프링 트레이닝때 그는 지켜보는 사람들을 계속 놀라게 했다.
컵스에 새로온 포수 대미안 밀러는 그와 케리 우드에 대해 이런 얘기를 했다.
" 그들의 스터프는 제가 봐온 가운데 최고급입니다.
랜디 존슨과 커트 쉴링 보다 좋으면 좋았지 떨어지지 않아요. "
프라이어는 2003년 시즌 불꽃처럼 강렬히 빛났다.
팀 동료와 상대팀 선수들은 모두 그의 딜리버리의 매력에 뻑이 갔고
그가 가진 조용한 매카닉스에 넋을 잃었다.
" 그는 제가 봤던 그 누구보다도 스무스한 딜리버리를 가지고 있어요.
볼이 그저 손에서 튀어나오는거예요. 술술 던지죠.
그는 어떤 게임 상황에서도 다음 타자에게 어떻게 던질것인가.. 라는걸
짐작하지 못하게 하는 투수입니다.
그는 어프로치를 전혀 바꾸지 않아요. 놀라울 정도로 집중하고
자신이 스스로 열받아 하지 않도록 하는거죠. "
라고 케리 우드는 말했다.
또 팀의 베테랑 투수인 마이크 램린저는 이런 얘기를 한다.
" 그는 사람들이 말하는 ' 엄청난 내공의 침착함'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건 뭔가 마구 엉망이 되어가기 시작할 때 자신이 하고 싶은 것이 무언가..라는
개념을 유지하는 능력이지요.
그 나이에 그런 능력이라니.. 놀라울 수 밖에요. "
시즌이 시작되고 한달 조금 더 지났을 때 프라이어에겐 테스트가 닥쳤다.
컵스는 샌프란시스코에서 자이언츠와 경기를 했다.
스포츠 역사상 최고의 홈런 타자인 배리 본즈는
이틀전 우드에게 두 번 볼을 맞으면서 거의 성깔을 부릴뻔 했었다.
프라이어의 전략은 본즈에게 인사이드 공을 던지고, 다음에 아웃사이드로 던지고
그리곤 다시 인사이드 공을 던지는것이었다.
프라이어가 던진 세 번째 공은 이 38살의 배리 본즈 허벅지에 맞았고
본즈는 욕을 퍼부으면서 마운드를 향해 걸어가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것은 프라이어의 순간이었다.
그의 반응은 야구계의 기록에 길이 남겨질 것이다.
그의 담력과 터프함과 게임에서의 위상에 대한 얘기들로 말이다.
피칭은 존경에 대한 것이다. 존경이 없다면 투수는 껍데기인 것이다.
프라이어는 본즈를 향해 걸어나갔다.
" 저는 거기 있었습니다. 그때 제 반응은 이랬죠.
' 이거 재미있겠는걸 ' 이라구요.
마크가 얼마나 강한지 아는 사람은 그렇게 많지 않습니다.
예전에는 이런걸 장력.. 이라고 불렀는데요.
즉 키가 큰 사람이 네모형의 체격을 가진 사람보다 더 강해질 수 있다는거죠.
확실히 본즈는 체격이 큽니다. 하지만 저는 마크가 물러서지 않을거란걸 알고 있었죠."
라고 그의 아버지 제리 프라이어는 말했다.
프라이어는 자신의 생각을 본즈에게 표현했고 양팀의 벤치는 비워졌다.
프라이어는 단 한걸음도 뒤로 물러서지 않았다.
그러나 펀치가 오간 것은 아니었다.
" SC 코치와 함께 중계방송을 보고 있었는데요.
저는 경기가 진행되는동안 그의 셀폰에 전화를 했습니다.
그리고 우리 둘은 전화에 대고 이렇게 소리를 질러댔죠.
' 참 잘했다!!!! 네가 이긴거고 또 그정도 위협엔 꼼짝도 안한다는걸 보여줬어 !!!
우리는 네가 자랑스러워서 미치겠구나!! 쥑였어 아주!!! ' 라구요.
그는 싸우려고 그런건 아니었지만 자신이 옳다는 것을 알고 있었고
게임의 가장 유명한 이름 앞에서도 당당했습니다.
아마 그 일 이후에 리그 전체가 그를 다르게 봤을거란걸 내 보장하죠. "
라고 그의 대학시절 코치 길레스피는 말했다.
그일은 이번 시즌 프라이어에게 닥친 마지막 도전은 아니었다.
7월 초 그는 애틀랜타 브레이브스의 2루수 마커스 자일스와 충돌했고
그때 입은 부상은 올스타전에서의 등판을 건너뛰게 했다...
지난 6월로 돌아가서.. 양키즈와의 경기를 3일 남겨놓은 컵스의 덕아웃에서
프라이어는 자신의 다음 등판에 대해 전혀 마음이 동요되거나 하지 않고 있었다.
그는 자신의 새 집에 대해서 얘기했고
전철 타고 다니는걸 좋아한다는것에 대해 얘기했으며
어느 거리를 걷든지간에 좋은 식당을 찾을 수 있는 것이 얼마나 멋진지에 대해 얘기했고
또 고등학교시절 만난 자신의 약혼녀 헤더에 대해 얘기했다.
그는 진짜로 양키즈를 상대하는것에 대해 다르게 느끼지 않는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지금 덕아웃에 있는 수준 정도로
자신은 경기장에서도 모든것이 차단된 조용한 상태라는걸 인정했다.
" 저는 뭔가 분위기를 띄우려고 하지는 않습니다.
그저 제 자신 변하지 않으려고 하면서
제가 정말 좋아하는 동료들과 함께 하려고 하는거죠.
저는 바에 가지 않고 또 늦게까지 밖에서 머물지 않습니다.
집에 가서 침대에서 스포츠센터나 레터맨을 보거나 아니면 영화를 보죠. "
45분에 걸친 점심 시간동안 프라이어는 거의 모든 질문에 간단한 어조로 대답했다.
컵스의 핀스트라이프의 유니폼과 그 거대한 종아리만 뺀다면
아마 그를 보면서 그가 거의 HOFer 의 잠재력이 있다는 평가를는 선수라고
믿을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그가 게임에서 썼던 모자가 eBay 에서 천달러가 넘게 팔렸다는 것에 대해 :
" 좀 우습죠. 누군가 그정도 돈이 있다면 살만한 더 좋은게 얼마나 많은데요. "
뤼글리필드에서의 낮경기에 대해서 물어봤을 때 :
" 낮경기 좋아요. 마치 9시에 출근해서 5시에 퇴근하는 보통 직업을 가진 것 같은
느낌을 주니까요. "
자신의 딜리버리의 매력에 대해 물어봤을 때 :
" 제 매카닉스가 대단히 미학적인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그걸 멋진거라고 생각한다면 좋지요.
타자들을 아웃시킬 수 있는 한 별 신경 안씁니다. "
하지만 단 한가지 토픽에서 그는 좀 달라보였다.
그에게 완벽한 패스트볼을 던지는 것은 어떤 느낌이냐고 물어보자
그는 몇분을 내리 얘기했다.
" 오케이.. 이렇게 얘기하면 좋은 답변이 될 것 같군요.
우선 포수의 사인을 받아요. 그리고 딜리버리에 들어가죠.
온몸이 그 하나에 집중하는거예요.
대개 저는 공을 릴리즈하는 순간 그게 잘 던진건지 아닌지 알게 됩니다.
볼이 손을 떠날때의 그 느낌으로 알 수 있는거죠.
그리고 한 0.5 초 정도 저는 시야에서 볼을 놓칩니다.
그건 제가 그 피치와 분리되는 아주 짧은 순간이죠.
하지만 걱정하지는 않아요. 왜냐면 벌써 잘 되어가는지 아닌지 알고 있으니까요.
그래도 저는 다시 재빨리 공을 눈으로 쫓습니다.
그러면 공의 궤적과 방향과 포수의 미트까지 들어가는 각도를 볼 수 있죠.
공이 포수의 글러브에 들어갈 때 나는 소리를 들을 필요는 없어요.
거기 도착하기 전에 이미 좋은 피치인지 여부를 알 수 있으니까요. "
양키즈가 시카고에 도착하기 전 그들의 수뇌부는
프라이어가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 그와 계약하지 못했던 것이 실수였다는걸
인정하고 있었다.
양키즈의 부사장인 고든 블레이크리는 뉴욕 데일리 뉴스와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 우리는 계약문제를 참 서투르게 처리했습니다.
협상 막판에 충분하지 못한 금액을 오퍼했고 그는 대학으로 갔죠.
그는 지금 컵스가 아닌, 양키즈 선수여야했습니다. "
그러나 지금, 프라이어는 위기를 겪고 있다.
양키즈는 6회말 투아웃에 주자 한명이 나가 있고 컵스의 리드는 6 대 3 으로 좁혀져있다.
프라이어에겐 삼진이 필요했다.
대타 버바 트래멀이 타석으로 걸어나왔다.
프라이어는 잠시 눈을 감았다.
마음으로부터 vision 이 찾아왔다.
그리고 몇초 후 버바 트래멀이 삼진으로 물러나면서 상황은 끝났다.
6회까지 모두 열명의 양키즈 타자가 삼진의 희생자가 된것이었다.
관중들은 거의 광분 모드였다.
이후 컵스의 불펜은 흔들거렸지만 이 22 살의 대단한 투수를 위해 리드를 지켜줬고
그의 시즌 성적은 7 승 2 패가 되었다.
경기후 관중 3만 9천명이 뤼글리필드를 빠져나가는데는 30분이 더 넘게 걸렸지만
양키즈 팬이든.. 컵스팬이든 그 누구도
프라이어가 마운드에 올랐던 그날
그렇게 시간 걸리는거에 열받아하는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투구전 로진백을 만지고 있는 마크 프라이어.
그는 또한 미남이다 !
다음 아래는 mlbbada.com에서 활동하시는 양아치스님의 글이다.
작년에 컵스게임보면서
베이커 밑에 있으면 프라이어는 3년안에 망가질것이라 생각했는데
마침 투어에 저랑비슷한 생각을하신분이 명칼럼을.............
마크 프라이어와 투구수
95마일의 강속구가 홈플레이트 양쪽으로 핀포인트 컨트롤 되는 투수는 몇해전까지만 해도 페드로 마르티네즈 밖에 없었다. 그러나 이제 페드로 마르티네즈라는 이름보다 마크 프라이어라는 23살의 이 겁없는 영건을 대부분의 사람들이 언급하고 있다.
베이스볼 프로스펙투스의 한 칼럼에선 마크 프라이어를 야구계의 10대 보물중 하나로 선정했을 만큼 마크 프라이어는 최고의 자질을 지닌 선수중 한명이다. 더스티 베이커도 이와 같은 사실을 잘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더스티 베이커가 작년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선발투수는 승리를 위해 7이닝정도는 던져줘야 한다.'고 밝혔는데, 이는 마크 프라이어의 앞날을 생각했을때 대단히 위험스런 발언이 아닐 수 없다.
더스티 베이커가 선수생활을 할 당시에는 7이닝이 아무렇지 않은 단어였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지금 이 7이닝이라는 단어가 가지는 위험도는 더스티 베이커의 이팔청춘시절과는 매우 다르다. 투수들의 부상에 가장 깊은 연관이 있는 단어는 혹사라는 두 글자 일 것이다. 그럼 마크 프라이어는 혹사를 당했을까. 100년전의 투수에 비하면 혹사란 단어를 내뱉기에 매우 부끄러운 투구이닝을 마크 프라이어는 지니고 있다.
그러나 투수들의 부상은 과도하게 많은 투구이닝 보다 집중된 투구수가 더 중요한 요인이 될 수도 있다. 투구이닝도 물론 중요하다. 그러나 최근엔 많은 투구이닝이 부상을 일으킨다는 일반적인 생각 때문에 마이너리거들에겐 왠만해선 200이닝을 부여하지 않으며 기량이 검증된 신인급이라 할지라도 200이닝이상은 거의 던지지 않는다.
반면에 투구수는 그렇지가 않다. 감독들과 투수코치들은 투구이닝은 갈 수록 줄여주지만 이닝당 투구수와 게임당 투구수 같은 집중된 혹사에 관해서는 아직 그렇게 세심하지가 못하다. 하늘높은 줄 모르고 치솟는 타자들의 홈런 갯수와 더불어 게임당 투구수, 이닝당 투구수 같은 집중된 투구수 역시 시대가 지날수록 많아 지고 있는 것이 오늘날의 야구판 흐름이다. 그리고 마크 프라이어는 이러한 시대적 감안을 한다면 과거의 어떤 뛰어난 영건들 보다 투구수의 중압감에 눌리고 있다.
투구수에 관한 의문
필자가 과거의 투수들에게 가장 큰 의문을 가지고 있는 점은 샌디 쿠팩스 같은 투수들이 어떻게 해서 300이닝 이상을 던질수 있었을까란 의문이다. 알다시피 샌디 쿠팩스는 선수생활 당시부터 팔꿈치 부상으로 고생을 하고 있었지만 300이닝이 넘는 투구이닝을 기록한 적도 있었다. 그리고 사이영이나 월터 존슨은 어떻게 그런 터무니 없이 많은 투구이닝을 소화해내도고 오랫동안 선수생활을 할 수 있었을까.
이런 몇가지 의문속에 내린 결론은 크게 1. 타자들의 평준화 2. 투수들의 전력투구 이 두가지로 생각해 낼 수 있었다. 이런 생각을 가지게 된 요인은 국내프로야구에서 너구리로 통하던 장명부의 엄청난 투구이닝과 그에대한 인터뷰를 보고 난것이 계기가 되었다.
장명부의 83시즌은 30승 시즌으로 유명하지만 더 놀라운 사실은 장명부의 투구내용이다. 무려 427.1이닝의 투구이닝과 투구수 5886개는 지금으로선 상상조차 가지 않는 엄청난 기록이다.(경기수가 더 많은 메이저리그에서도 80년의 스티브 칼턴 이후 300이닝을 돌파한 투수는 아무도 없다. 그리고 1905년의 조 맥기니티 이후 400이닝이상 던진 투수는 존재하지 않는다.)
허나 이와 같은 괴력의 기록 뒤에는 바로 완급투구라는 비밀이 존재하고 있었다. 당시 일본프로야구에서 역수입된 장명부는 초창기 막 첫걸음을 내딛던 국내프로야구 타자들 보다 분명 한수위의 기량을 지니고 있었다.
이와 같은 사실을 잘 알고 있던 장명부는 하위타자나 수준미달인 타자들에겐 집중해서 던지지 않다 강한 타자들에게만 전력승부를 하는 철저히 체력안배를 가져가는 투구스타일로 일관을 했다. 그러나 지금의 국내프로야구는 그 실력이 상당히 평준화되어 수준미달의 타자들은 이제 프로야구선수 그자체가 되지 못하기에 이런 투구는 불가능할 것이다.
메이저리그도 마찬가지다. 1920년대의 베이브 루스는 야구사에 영원히 이름을 남길만할 강타자였을 것이다. 그러나 당시엔 리그평균에도 훨씬 못미치는, 현대야구에선 메이저리그에 손도 못 내밀 그저그런 타자들이 수두룩 했다는 것이다. 당시의 대투수들은 베이브 루스나 루 게릭 같은 강타자들에겐 혼신의 힘을 다 했음이 분명하다. 그러나 그저그런 타자들에게도 그럴 필요가 있었을지에는 의문이 든다. 이는 야구 초창기 시대에 볼 수 있는 선수자질의 불균형에서 오는 결과였을 것이다.
다음과 같은 통계를 보면 쉽게 이해할 수 있다. 1950년도 네셔널리그의 평균 ops와 작년 네셔널리그의 평균 ops는 매우 비슷하다. 그러나 타자들의 ops 분포도는 그렇지가 않다.
투수를 제외한 90ab이상의 타자들을 상대로 조사한 결과 아래와 같은 분포가 나타났다.
1950년 ops 1.000이상 -1명
ops .900이상-10명
ops .800이상-17명
ops .700이상-28명
ops .600이상-40명
ops .600미만-12명
리그평균 ops .733
2003년 ops 1.000이상 -6명
ops .900이상-17명
ops .800이상-49명
ops .700이상-76명
ops .600이상-53명
ops .600미만-18명
리그평균 ops .744
리그 평균 ops는 비슷한 수준이다. 그러나 1950년도엔 ops .600대나 그이하의 타자들이 전체의 절반정도인 48%의 비율을 차지한 반면 2003년도엔 32% 밖에 되지가 않는다. 이는 달리 말하면 쉽게 처리할 수 있는 타자가 그 만큼 줄어들었다는 것이다. 만약 같은 수준의 ops로 구성된 타순이라 할 지라도 1950년도의 타순은 하위타선과 상위타선의 그 격차가 크기 때문에 하위타선은 적은 투구수와 더 쉽게 처리 할 수 있는 반면 지금 현재의 타순은 그 실력이 균일하게 포진되었기 때문에 투구수 관리에도 곤란하게 된다.
이는 과거로 갈 수록 더 편차가 커지며 현대야구로 접근 할 수록 타자들의 전체적인 기량은 평준화 되고 있다.
이를 또 잘 반영하는것이 야구사학자들의 다음과 같은 주장이다. 야구사학자들은 1960-70년대 이후론 메이저리그 평균 구속은 거의 늘지 않았으며 패스트볼의 평균구속은 대략 80마일 중반대라고 말한다. 그러나 1960년대 그 이전엔 패스트볼의 리그평균 구속은 80마일 초반대라고 주장한다. 이는 투수들의 체격이 좋아졌다는것과 체계적으로 발전한 훈련도 한 몫하겠지만 갈 수록 평준화 되고 있는 타자들을 상대로 투수들이 보다 더 전력투구를 한다는 의미로도 볼 수가 있다.
타자들의 평준화, 그에따른 투수들의 일구일구 마다 더해지는 전력투구에 따른 어깨와 팔꿈치에 대한 무리가 오늘날의 투수들을 약골처럼 보이게 만드는 트릭일지도 모른다. 샌디 쿠팩스는 그 아픈 팔꿈치로도 300이닝이상을 던졌지만 당시엔 샌디 쿠팩스의 공을 치는건 꿈에서나 가능한, 엄밀히 말하면 메이저리그 수준에 미치지 못하는 타자들이 존재하고 있었다.
이들은 실력이 없는 투수들에겐 안타를 빼앗아 타율과 홈런을 기록할 수 있었겠지만 쿠팩스나 기타의 대투수들을 상대로해선 애로사항이 꽃피는 상황을 맞이 했을 것이다. 그야말로 '밥' 이 단어가 어울리지 않았을까.
쿠팩스나 드라이스데일 같은 대투수들은 이들을 상대로 굳이 중심타선을 상대로 했을시 만큼 강하게 던질 필요도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이런 요건들은 그들이 오늘날의 투수들 보다 더 적은 피로함 속에 더 많은 투구수와 이닝을 던질수 있도록 만들었다.
마크 프라이어의 위험도
그러나 마크 프라이어 같은 오늘날의 투수는 그렇지가 못하다. 그리고 마크 프라이어의 전체 투구수와 게임당 투구수 이 두가지를 보면 마크 프라이어는 리그에서 가장 위험함에 근접해 있는 투수중의 한명이다.
게임당 투구수는 113.3으로 메이저리그 전체에서도 1위이며 타자당 투구수도 4개에 육박할 만큼 혹사의 집중도는 높다. (매덕스 같이 체구가 적은 투수가 오랫동안 리그를 지배할 수 있었던 이유는 매덕스의 게임당 투구수와 타자당 투구수 이런 통계들이 리그 최하를 기록할 만큼 뛰어났기 때문이다. 반면 페드로 마르티네즈는 높은 탈삼진율 때문에 이닝에 비해 많은 투구수로 피로도는 높았다. 둘의 스타일은 틀리지만 집중되는 위험도는 페드로가 훨 씬더 높았으며 그 결과로 페드로는 과거와 같은 모습을 보이지 못하는 것 일런지도 모른다.)
더스티 베이커 감독은 선발투수라면 승리를 위해 7이닝은 던져야 된다고 했지만 메이저리그 전체를 통틀어 선발투수중 평균 7이닝이상을 던져준 투수는 작년 마크 프라이어를 포함해 바톨로 콜론, 마크 멀더등 5-6명 밖에 되지 않았다.
베이스볼 프로스펙투스에서 개발한 투수들의 혹사정도를 알 수 있는 PAP(Pitcher Abuse Points)에서 마크 프라이어는 메이저리그 전체에서 3번째로 혹사를 당한 투수로 언급되었다. 물론 같은 투구수라 할 지라도 투수들에게 동일하게 적용되지는 않는다.
랜디 존슨,커트 쉴링,리반 에르난데스, 바톨로 콜론 같은 경우는 해마다 이 PAP순위의 단골 손님들이지만 그들은 지금까지 잘 먹고 잘 살아 왔었다. 마크 프라이어도 다행히 스카우들이 내린 20-80스케일 평가에서 80을 받을 만큼의 완벽한 투구폼을 지니고 있는 투수다. 그러나 베이스볼 프로스펙투스의 PAP리스트에서 마크 프라이어는 가장 어린 투수며 대학시절에도 NCAA최고에 해당하는 혹사를 당해왔다는 점을 주목해봐야 한다.
이미 USC 3학년시절 18번의 선발등판 가운데 투구수 120개가 넘었던 적이 5회 그중 2회는 무려 130개를 넘겼었다. 당시 마크 프라이어의 나이가 21살 이었다는 것은 치명적이다. 그리고 전년도인 20살에도 이와 비슷한 투구이닝과 비슷한 투구수를 기록했다.
투구수 120개가 가지는 의미는 남다르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120개를 초과하는 것을 매우 위험한 투구수로 생각하는데 이는 통계적으로 보아도 전혀 틀린 말이 아니다. 레니 야자엘리의 조사에 의하면 투구수 120개를 넘긴 투수들의 그후 3주간 피안타율, 볼넷허용율, 실점율 등은 100개 근처의 투구수를 기록했을시 보다 월등히 높아진다는 것을 밝혔다. 이는 1989-1999년까지 10년이 넘게 축적된 통계치를 토대로 행한 자료이다. 120개의 투구수를 초과한 선발등판이 쌓여질 때마다 이런 위험도는 더욱 높아지며 부상의 위험도도 비례한다. 작년 마크 프라이어가 120개 이상의 투구수를 기록한 경기는 10회로 100개 이하를 기록한 경기를 찾아 볼 수 없을 만큼 나이에 비해선 비정상이다.
몇십년 후 마크 프라이어를 생각해 보면 어떤 그림이 그려질지 현재로선 모른다. 그러나 더스티 베이커가 선발투수들의 투구수에 그다지 신경을 쓰지 않고 있다는 것은 확실하다. 샌프란시스코 감독이었던 2002시즌 더스티 베이커는 선발투수들에게 투구수 120+ 경기를 메이저리그에서 가장 많이 부여한 감독이다. NL평균이 7회였던 반면 베이커는 19회나 그런 짓을 저질렀다.
이는 컵스에 와서도 마찬가지다. 케리 우드는 단번에 리그최고의 혹사왕으로 변신했으며 카를로스 잠브라노 같은 영건들도 다른팀이라면 생각할 수 없을 만큼의 투구수 속에서 공을 던지고 있다. 더스티 베이커는 선발투수라면 7이닝은 기본이라고 생각할지 모르나 전미대학 역사상 최고의 투수라는 찬사를 받은, 그리고 드와이트 구든의 신인시절과 비교해도 손색이 없는 활약을 보이고 있는 마크 프라이어를 생각했을때 7이닝을 고집하는건 그리 좋지 만은 않을 것이다.
A.J. 버넷이 부상당하기 전 120+ 투구수를 기록한 선발경기는 마크 프라이어와 같은 10회이다. 그러나 A.J. 버넷의 팔꿈치가 다음해에 박살날줄 알았던 사람은 없었다.
올 시즌 개막과 함께 부상으로 DL에 올랐던 마크 프라이어는 얼마전 무사히 복귀전을 치루었고
얼마전엔 로캣맨 로저 클레멘스의 10연승을 저지하기도 하는등 올해도 최고의 해를 구가하고 있다.
마크 프라이어의 투구를 보고 있노라면 숨이 막혀 아무말도 하지 못한다.
팀에 또 다른 에이스 케리 우드가 있지만 마크 프라이어가 나에게 가져다주는
기쁨을 케리 우드에게서는 찾을 수 없다.
이래서 내가 세상 살 맛이 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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